최은영 『밝은 밤』

여성의 삶을 담담하게 이어 그린 장편소설

by motifnote


최은영 작가의 장편소설 『밝은 밤』을 읽기 시작한 날은 유난히 조용한 밤이었다. 하루가 끝났는데도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 괜히 불을 끄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내던 날. 요즘 들어 한국소설, 특히 여성 서사가 담긴 장편소설을 자주 찾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밝은 밤』은 오래전부터 ‘꼭 읽어야 할 소설’로 추천받아온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목이 선뜻 다가오진 않았다. ‘밝다’는 단어는 종종 너무 쉽게 위로의 언어로 쓰이니까. 다 지나갈 거라는 말, 결국 괜찮아질 거라는 말처럼 의도는 좋지만 마음을 더 외롭게 만드는 경우도 많아서였다. 그래서 큰 기대 없이 책을 펼쳤다. 그런데 몇 장을 넘기자마자 알게 됐다. 이 소설이 말하는 ‘밝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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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의 줄거리는 요란하지 않다. 극적인 사건이나 빠른 전개 대신, 한 여성의 삶이 다른 여성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할머니의 삶에서 엄마의 삶으로, 그리고 다시 그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시간들. 누군가의 인생이 끝나는 지점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인생이 시작된다. 이 소설은 그렇게, 개인의 삶이 어떻게 다음 세대의 토양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눈에 띄는 성공을 거두지도 않는다. 누군가에게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서 선택하지 못했던 길, 말하지 못하고 삼켜야 했던 순간들, 혼자 감당해야 했던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리고 그 쌓임이 결국 한 사람의 삶을 만든다.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건 소설인데, 왜 이렇게 현실 같지?’ 아마도 『밝은 밤』이 한국 현대 여성 소설로 오래 회자되는 이유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결을 그대로 담아내기 때문일 것이다. 꾸며내지 않아서, 설명하려 들지 않아서, 오히려 더 진짜처럼 느껴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불행을 설명하지 않는 태도였다. 『밝은 밤』은 고통을 과장하지 않는다. 슬픔을 크게 외치지도 않고, 비극을 감정적으로 몰아가지도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놓아둔다. 그리고 읽는 사람이 스스로 느끼게 만든다. 어떤 인물은 사랑 때문에 자신의 삶을 미뤄야 했고, 어떤 인물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침묵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선택은 ‘옳다’ 거나 ‘잘못됐다’는 말로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상황은 늘 복잡하고, 감정은 늘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더 현실 같다. 우리가 사는 삶도 늘 그렇지 않나. 누군가를 탓하기엔 너무 많은 사정이 얽혀 있고,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가 버리는 일들. 이 소설은 그 애매함을 그대로 둔다. 판단하지 않고, 대신 보여준다. 그래서 읽는 내내 마음이 자주 멈칫한다. 문장을 넘기다가도 괜히 속도를 늦추게 되고, 어떤 장면에서는 책을 잠시 덮게 된다. 감정을 따라가는 데 시간이 필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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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을 읽으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이 있다. 이건 분명 내 이야기는 아닌데,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다는 느낌. 나는 이 소설 속 인물들처럼 격렬한 시대를 통과해 온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감정의 방향은 너무 익숙했다. 말 꺼냈다가 괜히 분위기만 흐릴까 봐 삼킨 말들, 예민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넘겨버린 상처, 설명해 봤자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아서 혼자 정리해 버린 마음들. 그렇게 정리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그냥 접어두었을 뿐인 감정들. 『밝은 밤』은 그런 감정들을 정확한 문장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스스로 알아보게 만든다. “이게 바로 그 감정이야”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느낌, 알지?” 하고 조용히 옆에 앉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는 동안보다 읽고 난 뒤 더 오래 남는다. 책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이 소설에서 밤은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완전히 깜깜한 어둠은 아니다. 너무 오래 이어져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 상태에 가깝다. 그래서 아주 작은 빛에도 반응하게 되는 밤. 누군가의 한마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태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이어온 삶 같은 것들. 『밝은 밤』이 말하는 밝음은 모든 걸 해결해 주는 희망이 아니다. 갑자기 세상이 달라질 거라는 약속도 아니다. 그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해주는 정도의 빛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위로는 요란하지 않고, 대신 오래간다. 읽고 나서 한참 뒤에야 그 의미를 곱씹게 된다.



책을 덮고 나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감동적이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조용했고, 슬펐다고 하기엔 너무 단정했다. 대신 마음 어딘가가 오래 눌려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내가 알지 못했던 삶들을 잠시 맡아두고 있는 사람처럼. 『밝은 밤』은 “그래도 잘 살아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쉽게 희망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런 삶도 있었고, 그 삶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고. 그리고 그 사실을 기억해 달라고. 그래서 이 책은 위로받고 싶을 때보다는, 조용히 생각하고 싶을 때 읽기 좋은 소설이다. 한국소설, 특히 여성 서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밝은 밤』은 반드시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읽는 동안보다 읽고 난 뒤, 더 많은 생각을 남기는 소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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