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연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사랑을 바라보는 ‘입장’에 대하여

by motifnote

유수연의 시집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는 사랑을 말하지만 달콤한 고백보다는 사랑을 둘러싼 입장과 거리, 시선의 차이를 더 오래 바라보는 시집이다. 그중 1부 「네가 웃으니 내 세상이 위로가 돼」는 사랑받는 사람보다, 사랑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더 가까이 가 있다. 〈스스로〉는 그 중심에 있는 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시작되는 시. 그래서 이 시는 처음부터 조용히 물러서 있다. 다가가지 않고, 대신 오래 본다.




시의 첫 문장을 읽고 조금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사랑은 보통 ‘하는 쪽’의 감정이라고 생각해 왔다. 사랑한다는 말은 늘 주어가 분명해야 한다고 믿었고, 사랑은 참여하는 사람의 몫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 시는 시작부터 사랑을 바라보는 입장에 둔다. 그리고 그게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 문장을 읽고 예전에 그런 순간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내가 사랑의 중심에 있지 않았던 순간. 누군가의 마음속에 내가 있지 않아도, 그 사람이 누군가를 향해 웃는 걸 멀리서 보던 시간들. 이상하게도 그때 마음이 따뜻했다. 섭섭하기보다, 부러움보다, 묘하게 잔잔한 기분. 그 감정은 드러낼 수도 없고,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그냥 나만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더 진짜 같았던 감정이었다.



겨우 꽃망울을 터뜨린
새벽의 은방울꽃을 몰래 본 기쁨처럼

이 구절에서 괜히 숨을 조금 낮추게 됐다. 새벽이고, 은방울꽃이고, 몰래 본다. 이건 크거나 요란한 기쁨이 아니다. 자랑할 수도 없고, 사진으로 남길 수도 없는 기쁨. 들키면 사라질 것 같은 기쁨이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간직해야 하는 감정. 사랑도 그런 순간이 있지 않나. 아직 말로 만들기 전, 아직 관계가 되기 전, 그냥 혼자만 느끼는 단계의 마음. 이 시는 그 감정을 미숙하다고 하지 않는다. 착각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을 아주 정성스럽게, 마치 유리처럼 다루듯 들여다본다.


읽다 보면 이 시는 계속해서 아름다움과 불편함을 같이 놓는다. 반딧불의 빛과 그 안에 있는 곤충의 징그러움, 축제의 번데기와 눈 질끈 감고 삼켜버리는 선택. 보통 우리는 보기 좋은 쪽만 선택하려고 한다. 불편한 건 눈 감고 넘기거나, 아예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근데 이 시는 말한다. 그렇게 눈을 감아도 결국 보이는 건 남아 있다고. 아름다움만 취하고 싶어도 그 이면은 함께 따라온다는 사실을 이 시는 애써 포장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빛을 내고 누군가는 빛을 받고
누군가는 누군가의 누군가가 되고 싶어
그 주위를 돈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잠시 책을 덮었다. 그동안 나는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빛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빛을 받는 쪽에 서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 주변을 맴돌기만 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입장들은 전부 다 다른 감정을 만든다. 질투가 되기도 하고, 동경이 되기도 하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슬픔이 되기도 한다. 이 시가 좋았던 건 그 어느 쪽도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다만 말한다. 그 입장이 되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고.


그래서 이 문장은 한동안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늘 내 자리를 정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고, 관계 속에서도 내가 어디쯤에 서 있는지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 시는 그 욕심을 가볍게 무너뜨린다. 빛을 내는 사람도, 빛을 받는 사람도, 그 주위를 도는 사람도 모두 같은 장면 안에 있고, 그 위치는 고정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내가 중심이라 믿었던 자리가 사실은 누군가의 주변이었고, 또 어떤 날은 아무 의미 없다고 여겼던 맴돎의 시간이 누군가를 오래 바라본 증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관계에서의 내 위치를 너무 서둘러 규정하려 했던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조심스럽게 따라왔다.



죽어도 알 수 없지
죽어본 적 있는 별만
이리 밝은 일을 하잖아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시의 말투는 더 조용해진다. 이 문장은 위로처럼 읽히지도 않고, 정답처럼 들리지도 않는다. 그냥 “우리는 모른다"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문장 같았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밝은지, 왜 어떤 사람은 늘 침묵 속에 있는지, 왜 어떤 관계는 끝내 설명되지 않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 채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보거나, 혹은 빛을 그리워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장을 오래 붙잡고 있자, ‘밝음’이라는 것이 더 이상 부러운 상태로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시간을 통과한 결과처럼 느껴졌다. 쉽게 말해지지 않는 경험들, 설명하려 하면 오히려 왜곡될 것 같은 순간들, 스스로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견뎌야 했던 날들. 그런 것들을 지나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빛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시는 누군가의 밝음을 흉내 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각자의 어둠이 있고, 그 어둠을 지나온 방식 또한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조용히 인정한다. 밝지 않은 지금의 나 역시 언젠가는 누군가에게는 별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아주 미세한 가능성만을 남겨둔 채로.




〈스스로〉를 다 읽고 나서 사랑에 대해 하나 분명해진 건 있다. 사랑은 항상 중심에 서는 일이 아니라는 것. 때로는 멀리서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고, 주위를 도는 일이기도 하고, 아무 말 없이 빛을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 이 시는 사랑을 더 잘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게 이 시가 가진 힘인 것 같다. 조용히, 선량하게, 잦아들면서도 이상하게 오래 남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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