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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Oct 29. 2021

빼앗긴 일상에 봄은 오는가

백신 맞을 권리, 백신 맞지 않을 권리 

 이 글을 쓰고 나서 확인해보니 정부가 2주 간 계도기간을 가진 후 단계적 일상회복을 적용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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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적 일상 회복 이행계획이 발표됐다. 일상 회복 이행이라기보다는 '백신 접종자 확대'를 위한 계획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19년 코로나 이후 백신이 배포되기까지 1년, 그리고 '백신 접종'에 대한 이슈는 줄곧 화두였다. 처음에는 백신을 정부가 얼마큼 확보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제조사의 이슈로, 제조사 별 부작용에 관한 이슈로, 연령대 별 백신 후유증에 대한 이슈로. 그리고 이제 미접종자에 대한 이슈가 화두에 올라온 것이다. 


 사실 나는 백신을 맞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 아직은 가임여성이고, 백신을 맞은 후 임신, 출산, 육아 등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에 대한 임상결과는 충분하지 않다. 잘은 모르지만, 섣불리 백신을 맞고 나중에 어떤 인연으로 2세를 가지게 되었을 때 부작용 사례가 드러나면 아이에게 참 미안한 일 아닌가. 한 달 정도를 고민하고서, 나는 충분히 안전하다는 임상결과를 보기 전엔 2세를 가지지 않을 생각을 했다. 물론, 프리랜서 강사로서 대면 강의를 받는 입장에서 들어오는 압력도 상당했다. 생계를 위해서는 백신을 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백신을 맞기까지 수없이 망설이고, 또 재차 삼차 고민과 결심을 반복해 결국 맞기로 결정하기까지 나는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가임여성으로서 백신을 맞기까지 쉽지 않은 숙고의 시간이 있었다는 뜻이다.

 나는 지난 7월 20일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어 2주간 (강제) 자가격리를 겪었다. 매일 다니던 수영장에 확진자가 다녀갔던 것이다. 내가 자가격리가 되든 말든, 수영장은 영업을 지속했고, 나와 같은 시간대에 수영장을 이용했던 사람들 중 1~3번 레인 (확진자는 1번 레인을 이용)의 해당자만 격리됐다. 아니, 수영장에서만 접촉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수영을 하면서는 대화를 하지 못한다), 샤워실, 탈의실에서 감염 확률이 더 높으며(여기서는 사용한 레인과 관계없이 얼마큼의 거리에서 접촉을 했는지 추적하기 어렵다), 심지어 확진자와 나는 성별이 달라서 샤워실, 탈의실 등 공간에서 마스크를 벗은 채로 2미터 이내의 거리에서 비말 접촉을 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수영장의 격리 대상인원들은 모두 음성반응이 나왔고, 어쩔 수 없이 음성인데도 2주간 격리조치를 당했어야 했다. 뭔가 행정당국의 역학조사가 무척 이상했는데 (보수적인 것도, 보수적이 아닌 것도 아닌) 그래도 어쩌랴. 급박하게 돌아가는 코로나 시국에서 할 수 있는 건 엉성한 행정조치와 행정처리과정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는 것뿐이며 이러한 개선 요청은 바로 실천에 옮겨지기 어렵다. 그나마도 격리를 관리할 행정관의 수가 넉넉지 않아 나는 격리 후 5일 만에 담당 배정을 받았다. 그것도 기다리다 못해 전화로 문의하고 지인의 도움으로 당국에 항의 끝에 배정받은 것이었다. 식량 및 보건용품은 격리 후 6일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격리기간은 14일이었는데, 거의 절반이 지나서야 구호품을 받은 셈이다(고마워요, 새벽 배송!). 


격리기간 동안 매일같이 해왔던 수영과 달리기를 할 수 없었다. 매일 아침 홈트레이닝을 했는데, 혼자 하긴 밋밋해 줌으로 모임을 만들어서 운동습관 모임 사람들과 함께 운동을 했다. 그래도 센터에 가는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추가 감염을 막기 위한 격리였지만 왠지 면역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좀 우울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기분전환을 위해 책과 영화를 많이 접했다. 그러나 엄청 좋아하는 책인데도, 영화인데도, 14일을 내리 갇혀서 읽고 보고 있자니 좀이 쑤셨다. 격리가 해제되던 날, 빼앗긴 자유를 되찾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나마도 혼자 사는 처지라 집 전체를 사용하며 다소 넓은 공간에 격리되어 있었지만, 수영장 멤버 중 식구들이 있는 사람들은 집 안에서도 혼자 쓰는 방안에 격리되어있었다고 했다. 강제로 자유를 빼앗겼던 14일 동안, 생각보다 자유는 퍽 소중한 것이라는 걸 절감했다. 덕분에 푹 쉬었다고 자위하기에는 너무 답답하고 좀이 쑤신 시간이었다. 


 9월 15일, 1차 접종을 맞았다. 화이자와 모더나 중 하나를 맞을 거라는 안내가 됐는데 병원에 갔더니 나는 모더나를 맞게 될 것이라고 했다. 각 제조사별로 백신의 부작용 비율도, 맞는 용량도 다 다른데 제조사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물론, 개개인의 선택을 허용할 수 있을 만큼, 백신의 수량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백신을 맞고서도 돌파 감염된 사례, 백신 때문에 오히려 확진 판정을 받은 사례, 백신 후 사망사례 등이 적지 않고, 각 백신에 대한 정보 역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인터넷 환경 하에 개인의 건강정보가 고려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배정된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두려웠다. 특히 모더나는 몸에 들어가는 용량도 많고, 부작용 사례도 가장 많은 백신으로 알려져 있어 더욱 그랬다. 그렇지만 어쩌랴. 나는 건강한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1차 백신은 별 무리 없이 맞고 지나갔다.

 그리고 10월 20일, 2차 접종을 맞았다. 1차에서 큰 문제가 없었기에, 나는 타이레놀조차 사두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크게 힘들지 않으면 운동도 여태 했던 것처럼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부터 무섭게 열이 오르더니 오한이 들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오한과 두통은 이틀간 이어졌다. 타이레놀을 먹으면 그나마도 좀 나은 것 같았지만, 몸의 전체적인 컨디션이 떨어졌다. 숨이 가쁘고 며칠 동안은 속이 허하고 추웠다. 아주 오래간만에 무섭도록 아팠다. 이렇게 아팠던 건, 꾸준히 운동을 시작한 2018년 이래로는 처음이었다. 무섭고, 외로웠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건가 싶기도 하고. 백신을 맞은 것이 후회가 됐다. 쓰나미를 피하려다 지진을 겪게 된 느낌이었다. 그렇게 아프고 나니, 백신에 대한 생각이 여러모로 달라졌다. 이게 정말 나를 위한 일이 맞나? 집단 면역을 만들려다 내가 건강을 잃게 된다면 누가 나를 지켜줄 수 있나(없다). 내가 2차 백신을 맞고 호되게 앓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아버지께서는 부스터 접종 맞기를 보류하셨다. 


 나와 키가 같은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살이 자꾸 빠지고(그녀는 정상체중인 나보다 15킬로 정도 덜 나간다) 면역력이 뚝 떨어져 건강을 유독 더 민감하게 챙기는 내 친구는 몸 상태를 고려해 백신을 맞지 않고 있다. 그래도 매일 운동을 해야 활력이 유지된다며 필라테스는 꾸준히 챙긴다. 자신의 면역력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의사로서도 딱히 이유를 찾지 못해 내 친구의 접종 거부는 의사의 소견을 더할 수 없이, 그저 내 친구의 자유의지에 수반한 판단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백신을 맞고 바뀔 몸과의 문제는 오롯이 그녀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6살 난 아들을 돌봐야 하고, 남편을 내조해야 하며, 일찍 시어머님과 사별하신 시아버님과 아버지와 이혼하고 홀로 지내는 친정 엄마를 틈틈이 돌봐야 한다. 누군가는 백신으로 하루 이틀 아프고 지나 보내는 일이지만, 그녀에겐 백신이 무섭다. 

 

이십여 년째 천식을 앓아온 나의 작은어머니도 백신을 이겨낼 체력이 형성되어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 백신을 맞지 못하고 있다. 매일 저녁, 흡입기를 불고, 요즘같이 날이 추워지는 환절기엔 더욱 컨디션이 난조라 각별히 신경을 쓰는 작은어머니다. 그녀에게도 매일의 직업이 있다. 건강에 자신이 없는 이들로서는 매일의 직업을 유지할 수 있는 체력이 간절하다. 매일 간절히 체력을 보존하는 하루하루를 살기에, 백신을 선택하는 것이 무섭다. 의사의 소견을 첨부해 백신 접종을 면제받을 수는 있지만 내 친구나 작은어머니는 일상 회복 계획이 발효되는 11월 1일부터는 48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PCR 검사 음성 확인증을 지참해야 일상의 운동을 지속할 수 있다. 


 살기 위해 운동하는 이들이 있다. 꼭 질환이 없더라도 하루하루의 활력을 겨우 만들어 버티는 사람들에게 매일의 코로나 간이검사는 다소 비현실적이다. 지금의 몸 상태로 백신을 맞을 수도, 운동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이들에게는 단계적 일상 회복 계획이 오히려 일상을 뺏는 계획이 됐다. 48시간 간격으로 코로나 간이검사를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소비해야 할 시간, 게다가 코로나 검사기관은 점차 개소를 줄여가는 추세다. 자가검사 키트로 비감염을 등록하는 시스템을 마련할 수는 없을까? 48시간의 간격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조정할 수는 없을까? 비감염자를 위한 최소한의 선별 진료장비를 각 행정구역의 행정복지센터에 설치/운영할 수는 없을까? 어차피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어도 담당자 배치까지 5일이나 걸리는 당국이었는데, 일반인에게 48시간의 제한적인 시간(더구나 PCR검사는 24시간 운영하지 않는다. 검사에 응할 수 있는 시간은 Daytime기준으로 48시간 중 고작 16시간에 불과하다)을 주는 것은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물론 아직 백신을 맞지 않은 150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자가검사를 선량하게 이용할 거라고 믿을 수는 없을지 모른다. 당국은 안일하지 않도록, 그렇지만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효과적인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다방면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어쩌면 공무원들은 우선적으로 백신을 맞았기 때문에 비접종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단계적 일상회복의 지침이 누군가에겐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을 야기할 수 있고, 오히려 일상을 더 강한 제재로 빼앗아가는 조치이며, 백신 접종이 단순히 설득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백신을 맞으면서 2세를 포기했다. 신뢰할 만한 결과를 보기 전까지(아마도 10년 정도 걸릴 것이다) 나는 임신과 출산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접근할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작지 않은 문제다. 내가 포기한 가능성만큼이나, 비접종자들은 매일 생존을 위해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리고 끝내 백신을 맞지 않는다 해도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백신을 맞기로 한 선택만큼이나. 오히려 나는 이들 중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백신을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대한 선택지가 없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상당 부분 백신을 맞지 않아서 생기는 불편함을 감내할 각오가 되어있을 것이다. 불편하지 않으려고 생사여부가 불확실한 선택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들에게서 일상을 뺏는. 이를테면 매일 꾸준히 해 왔던 운동을 할 수 없도록 48시간 주기의 PCR 검사라는 큰 장애물을 주는 것은 조금 과장하면 이들에게 '빨리 죽을래, 서서히 죽을래' 하는 선택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당장 나도, 10월 20일 2차 접종 이후 11월 1~3일까지는 접종 완료 14일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센터에 운동을 하러 갈 수 없다(3일 동안, 정석대로라면 코로나 검사 확인이 두 번이나 필요하다). 가장 가까운 선별 진료소는 3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 아주 멀지도 않지만, 쉽게 찾아가기엔 번거로운 거리다. 거국적으로 차별이다, 차별이 아니다를 논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저 당사자로서, 혹은 가까운 이가 비접종으로 인해 느끼는 불편함을 드러내고 싶을 뿐이다. 모두를 위한 정책이 있을 수는 없지만, 소수의 국민도, 세금을 내는 국민이며 그들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는 것이 위정자의 역할이기도 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한 국가방역은 중요하다. 집단면역의 형성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받아야 한다. 둘이 어떻게 병행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다각적인 접근과 검토가 필요하고, 그를 위해 당국도 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노력여부와 관계없이 내가 경험한 정부의 시행방책엔 늘 아쉬운 점이 있었다. 개인차원에서, 혹은 거국적 차원에서. 보다 본질적인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정부는 작은 불편함부터 본질에 대한 방향 탐구까지, 통제를 위한 통제, 실적을 위한 실적을 시행하지 않도록, 표면적으로 눈에 드러나는 것들만 국민에게 보여주며 눈가리고 아웅이 되지 않도록 연구하고 탐구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조금 불편한 문제지만, 누군가에겐 생존의 문제다. 코로나19는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가 어떤 방식으로 존중받고, '개인의 존엄성' 이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큰 화두를 던져준다. 아무쪼록,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집단면역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생존권과 존엄성을 공격하지 않는, 다양성과 생명이 함께 존중받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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