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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Oct 30. 2021

인연에 대처하는 사랑꾼의 자세

의지로 되지 않는 인연의 시간표

 고백해야겠다. 나는 금사빠인 것 같다(금세 사랑에 빠져버리는). 신기하게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타인에 대한 좋은 점이 먼저 눈에 들어와서는 담뿍 빠져버린다. 그가 가진 좋은 점을 닮고 싶고 배우고 싶다. 어느새 말투와 취향이 닮아간다. 마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주인공 일순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카피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사람의 좋은 면을 카피하곤 했다. 나를 아끼는 언니가 조언해 주기를, 예림은 주변에 만나는 사람들의 영향을 참 많이 받는 타입이라, 좋은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한다고 할 정도로(고마워요 언니!).


 좋아하는 사람을 닮고 싶어 하는 것을 스피노자 식으로 이야기하면, 일종의 경쟁심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 중요하게 여기는 것, 나도 이만큼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러니 나도 좀 봐줘요." 하는. 스피노자는 경쟁심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맞는 말이다. 스피노자. 하. 이런 뇌섹남.


 그런데 그런 마음들이 사랑이었나를 엄밀히 생각하다 보니, 머리를 딱 때리는 것 같은 통찰이 온다. "나 좀 봐주세요.", "나 좀 예뻐해 주세요." 도 사랑인 건가. 어제 사랑에 대해 친한 동생과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 나는 그 사람이랑 함께 있으면 너무 정서적으로 안정되었거든. 내가 이렇게 안정되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여태 만났던 사람들과 객관적인 조건을 봤을 때 그렇게 도드라지지 않아도(그렇다고 그가 남들보다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 안정감이 정말 크다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가끔 속을 썩일 때, 이 사람을 만나는 이유가 안정감이라면, 이렇게 속을 썩일 때는 내가 이 사람을 왜 만나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거지." 


<나는 그래. 우리는 결국 시간을 쌓아 올리다 보면, 누군가의 속을 썩이게  수밖에 없어. 내가 나한테 만족스럽니? 내가  속을 썩이는 적은 없었니? 수두룩 빽빽하잖아. 그런 순간은. 그런데 하물며 사랑한답시고 많은 시간을 삶에 덧대고 함께 보내는 사람과 안정감만 주고받기기대하는  난센스지.  사람이 너에게 무엇을 줘서,  사람이 너에게 '무엇'이라서. 네가 생각한 어떤 '조건'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닐 거야. 그냥 인연이 닿았는데, 인연을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가장 좋다고 느끼는  하나  , 꼽아보는 거지. 우리는  이유를 찾고 싶으니까.  이유만으로 설명이  되는 것들조차도.>


 몇 번인가 이별을 경험하고서야 인연이 뭔지 어렴풋이 느낀다. 이별을 두고서 그 사람이 내게 무엇이었던가, 어떤 이유로 헤어졌던가, 난 뭘 더 했어야 했었나 생각에 꼬리를 물다, "쓸데없는 생각도 참. 나 지금 한가한가 보네." 하는 생각에 닿는다. 어떤 이유로 만났고, 어떤 이유로 헤어졌으며, 그 안에서 주고받았던 게 사랑이었는지 뭐였는지, 아무튼 내게 좋은 것이었다고.  


해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 세상에 나온 싯다르타가 처음 만나 깊은 관계를 맺었던 여자는 기생 카말라였다. 어느 순간 다가와서 카말라가 가진 사랑의 기술들과 마음들을 스펀지가 흡수하듯 배운 싯다르타는 카말라를 통해 거부 카와스와미를 만난다. 카말라와 깊은 관계를 가지면서 카와스와미 곁에서 함께 일을 하며 세상 섭리와 돈의 섭리를 배운 싯다르타는 홀연 카말라를 떠나버린다.


P.126. 그녀는, 이 상실의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자기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를 정말 그토록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으로 자기 가슴에다 끌어안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리고 자신을 다시 한번 그토록 남김없이 그에게 바쳐서 자신을 온통 독차지하도록 하였으며 자신의 머릿속이 온통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사실을 떠올리며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겼다.


 카말라가 싯다르타와의 이별을 받아들일 때의 태도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한마디 말도 없이 홀연 떠나버렸는데(심지어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를 있는 그대로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생각하며 다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니.


 카말라와 싯다르타가 함께 하던 시절, 카말라는 싯다르타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그녀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혹은 사랑을 받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속의 여자들이 자신의 반려자에게 바라는 것처럼 그녀는 싯다르타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을 경제적 지원, 사회적 지원, 온 마음으로 사랑을 전하는 등 모두 다 해주었다. 그러한 시간들이 스스로도 흥미로웠을 것이다. 그가 떠나는 순간, 함께 하던 시간 동안 모든 것을 다 주었기에 오히려 자신의 곁에서건, 곁이 아니건 그가 행복하기를 온 마음으로 빌 수 있었을까.


 이별 후에도 카말라는 순간에 머무르며 온 마음을 쏟는다는 것이 행복임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갔지만 그와의 시간 속에서 배웠던 것들은 그녀의 삶 안에 남아있다. 오롯이 현재에 머무르며 기뻐할 줄 아는 능력은 싯다르타가 곁에 있다면 부스팅이 되었겠지만, 본질적으로 그로 인해 그녀는 현재에 머물러 행복을 느끼는 법을 배웠다. 온전히 머물러 행복할 수 있다면, 누가 나와 함께 있든, 혹은 떠나가든, 행복한 순간들은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렇게 행복한 순간들을 내 안에 담을 수 있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떤 순간들이든, 좋고 싫음은 그때의 기분이 많이 좌우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기분이 지나가면 전혀 달랐던 일들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다만 내 마음이 온전히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떤 일이건 괜찮다. 사랑은 대상에게 내 결핍을 채워달라 요구하고,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조건부로 거래하는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온 마음을 주어도 괜찮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 마음을 주었더라도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게 된다. 인연이 다 할 시점이 두려워 마음을 다하지 못하면 미련이 더 크게 남는다. 인연은 잘하고 못하고의 의지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헤어질 수밖에 없으면 헤어지게 되거나, 끊어내도 만날 수밖에 없으면 또다시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성적으로 맺고 끊음이 필요하다면 마음속으론 끊어졌어도 적당히 교언영색하거나, 아쉽고 안타까워도 의지로 멀리하는 상황들이 만들어진다. 그것조차도 인연이다.


 어제 혹여 헤어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무서워하던 동생 녀석에게, 이야기를 해줬다.

 네가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을 놓지 않는 한, 인연의 시간표는 다 하지 않은 거라고. 좋은 모습을 보이든, 힘든 모습을 보이든, 그는 너를 좋아한다고. 평소와 같지 않았던 모습을 보였다고 사람을 빠르게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지금 잡고 싶다면, 그런 마음의 소리를 따르라고. 다만,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면서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스스로 만나는 일이라서 (그렇게 내 마음을 만나주는 시간이 없이는 혼자서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고 상대에게 의존하게 될 테니까) 그의 반응이나 행동에 일희일비하는 사랑을 하지 말라고.  


 내 행복은 내가 챙기되, 그와는 주어진 인연의 시간표에 충실하면 된다고. 네 마음이 그를 향하는 이상은, 당장은 니 맘대로 되지 않더라도, 결국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이루어지게 될 거라고.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불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더라도 기다려줄 수 있는 게 인연이라고. 그렇게 기다려주면, 그 사람은 너를 고마워하면서 가장 기쁘게 했던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혹은 인연의 끈이 끊어졌더라도, 나는 내 마음을 괜찮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다독이며 나아갈 수 있다고.


나는 이 녀석에게, 네가 이겨내야 할 건 이별의 아픔이라기보다 성장통이라 말하고 싶다. 무언가를 요구하느라, 원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을 만나느라 계산하는 사랑이, 말로 설명이 안 되는 불가사의한 인연을 믿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크느라 힘들지만, 그만큼 다행인, 사랑통에 울고, 성장통에 자라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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