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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Nov 22. 2021

잘 부탁드립니다

서툴지만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투둑. 관계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순리보다 급하게 다가간 탓이다. 


나도 안다. 인정욕구가 강해서 정말 내적 친밀감이 생기는 것보다 더 빠르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친밀해지고 싶다는 걸.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결코 그에게 인정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닐텐데,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어서 서둘러 다가갔다.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나, 자기애가 강한 사람, 배울 점이 있는 사람, 혹은 뭔가 묘하게 거슬리는 점이 있는 사람에게 나는 빨리 다가간다. 친밀하게, 또 내가 가진 것 이상으로 명랑하게. 묘하게 이런 때는 타인지향이 높고 성취욕구가 강해져서 그와 친해지는 것이 일종의 미션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친해지지만, 종종 관계의 속도위반으로 아픈 딱지를 끊는다. 진짜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의도보다는 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앞선 마음을 상대가 귀신같이 알아챘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어줍잖은 추측과 판단으로 왜곡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소설을 쓰고, 그러다 마음을 썼음에도 끝내 멀어져버린 관계에 아파하기도 하고, 자책을 하기도 하고.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무슨 생난리를 쳐도, 틀어진 관계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다친 마음에 생채기만 나고,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괜히 위축되기만 할 뿐. 


인연이라는 것은 본래, 서로 좋기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터다. 삶과 삶이 만나 연이 되면, 상황과 기질, 살아온 경험들과 상처, 혹은 강점 등등에 따라 관계를 대하고 서로를 위하는 과정에서 쓰는 방식의 차이가 맞부딪친다.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 되기까지 각자 서로가 주는 느낌과 신호에 따라 자신을 위해, 그리고 상대를 의식하며 서로가 최선의 방법을 쓴다. 지나고 나면 그것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었다 느낄 수 있지만, 그 때에 올라오는 여러 변수들과 감정들을 감안한 최선의 말과 행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내 수준과 상황, 그때의 변수들이 조합되면 나는 아쉽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최선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방법이 최선일 정도로 나는 수양이 덜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그를 이해하고, 혹은 그가 나를 이해해주고, 연의 끈을 이어갈 수 있으면 인연인 것이고, 감당할 수 없으면 인연이 다한 것이다. 


어떤 최선은 아프고, 어떤 최선은 아프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객관적으로 그 행동과 말이 옳았다, 옳지 않았다는 옳고 그름의 프레임이 아니다. 어떤 말과 행동이든 다 나름의 맥락이 있고 이유가 있다. 다만 이 사람의 나와 다른 최선을 내가 아프지 않게 받아들이며 공존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봐야 한다. 똑같은 행동이라도 어떤 사람은 아프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간다. 누구에게나 맷집이 강한 영역과 맷집이 약한 영역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서로의 약한 부분을 존중하고, 강한 부분은 서로 편하게 주고받으며 관계를 맺어나가려면 어느 정도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 시간을 속도위반해 빠르게 다가가려고 하면 본의 아니게 약한 점을 무디게 건드리기도 하고, 강한 점을 알아주지 못하게도 되는 것이다.  


 '잘 부탁합니다' 는 말은, 무조건 예쁘게 봐달라는 말이 아니다. 무엇을 잘 부탁한다는 것일까를 놓고 보자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 동안, 잘 모르는 상태에서 택한 나의 최선이 당신을 불편하게 하더라도, 시간이 필요할 수 있으니 당신을 두고 최선의 방법을 찾는 과정으로 봐 주십사 하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지금의 불편함을 빠르게 판단하고 규정짓기보다는 서로 맞춰가고 있는 과정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달라는 표현이다. 


 화초도 좁은 임시화분에서 넓은 화분으로 분갈이를 하면 몸살을 앓는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더라도 갑자기 타국으로 여행을 나가 음식을 맛보다 보면 물갈이 배탈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시기를 지나고 나면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언제그랬냐는 듯 적응해 더 견고하고 편안하게 적응하고 공존한다. 모든 종류의 변화는 처음에는 아프고 괴로운 법이다. 그리고 누구든 변화에서 편안함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적응하고자 한다(최선을 다해 저항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와 다른' 이라는 이유로 더 빠르게 다가가 편한 사이가 되려고 했다. 그와 나의 관계를 위했던 것이 아닌, 순전히 내 욕심이었다. 그리고 욕심의 댓가를 치러야 할 때는 아프다. 타인이 어떤 사람이었건 간에, 서두른 관계는 탈이 날 가능성이 크다. 아프지만 어쩌겠나. 마음을 전할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인연이라면 진심이 통할 수 있는 기회도, 그런 날도 언젠가는 올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인연을  소중히 대하는 마음으로 오늘 다시 기억한다. 인연을 대하며 서두르지 말자, 그를 충분히 안다 싶기 전에 친해지고 싶은 욕심을 먼저 내새워 앞서가지 말자, 늘 내 최선이 상대에게 맞지 않는 차선이나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최악의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럼에도, 나는 아마도 서두를 것이다. 또 먼저 다가갔다 괜히 상처를 주고 받고 오늘같은 생각에 잠길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이 부족함을, 진심을 주고받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도 그를, 잘 부탁받는다. 결국 미숙하고 서툰 삶에서 어떤 불완전이든, 다 귀하고 소중하며 예쁘다. 불완전이라 섣불리 명명했지만 사실은, 모두가 하나의 우주이며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귀한 과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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