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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Dec 05. 2021

사랑의 정의

조금 더 섬세하게 사랑에너지를 써 보자.

 이따금씩 ‘외로움’의 감정이 찾아올 때면, 나는 감정에 휩쓸리기도 하고, 혹은 감정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한다.


 외로움은 때로 나를 세상에 혼자밖에 없는 외톨이가 된 양 만들기도 하고, 그래서 서럽고 막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나는 외톨이가 아니고, 서럽고 막막한 건 오로지 기분 탓인 거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나는 “사랑”에 심취했다. 사랑이 마음속에 충만하면, 외로움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속 사랑은 무럭무럭 커져서, 뭐가 사랑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사랑을 많이 말하는 사랑꾼이 되었다.  그리고 사랑의 의미가 모호해져서, 나는 또 사랑의 에너지를 제대로 쓸 수 없어 힘들었었다.


어느 날엔가, 문득, 사랑한다고 말하는 횟수만큼, 사랑을 잘 알고 말하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세상에 사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라지만, 이게 사랑인지, 존경심인지, 존중감인지, 혹은 가슴 뛰는 느낌인지를 디테일하게 구분하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보단 사랑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좁은 범위 안에서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러한 관념의 범주가 서로 다르면 오해를 만들 수도 있을 테니까.


“나에게 사랑은 대체로 이성 간의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


곰곰이 고민해 본 결과 내가 말하는 사랑의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와 좀 다른 것 같았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주는 것들에게 나는 “사랑한다 말했다. 이성 간에 서로 사랑한다는 말도 때로는 서로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매개가 될 수 있겠지만, 살아있고, 왜 살아야 하는지, 또 더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게 만드는 생각과 느낌이 들 때면 나는 그를 느끼는 것의 매개가 되어준 사람에게 사랑한다 말하곤 했다.


세상을  이롭게 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도 세상 속 존재이기에, 그 일로 하여금 혜택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감사와 존경을 담아 사랑한다고 말했다.


외로워도 슬퍼도, 꿋꿋하고 꾸준하게 삶을 일궈 나가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람이 가진 고질적 아픔을 꿋꿋하게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 아름다웠다. 그가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다면, 나도 그렇게. 이겨내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사랑의 개념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금 오해를 사기도 했다. 나는 그저 사랑하는 이들과 공존하는 것이 좋다. 그들과 어떤 행위를 나누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물론, 나도 사람이기에 예쁨 받고 싶고, 귀여움을 받고 싶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의 행위를 나누고 싶을 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사랑의 행위를 나눌 수 있는 상대, 그러니까 서로의 불완전성을 온전히 내보이고,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며 기쁨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은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책임, 의무, 혹은 관계로 하여금 생겨나는 크고 작은 주고받음이 수반되는 일이다. 그래서 그저 사랑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관계를 나누자는 합의는 신중하고, 무겁고, 책임감이 필요한 것이다.


혹여 이러한 책임감들이 쉽게 발동되지 않도록, 나는 사랑의 표현을 조금 더 정제해 쓰기로 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책임감 있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듣는 사람에 따라 묘한 케미와 책임감, 소유욕이 발동하는 단어라는 걸 경험을 통해 알았다.


단어를 섬세하게 쓰자. 관념적인 언어는 나름의 정의로 사용하기 때문에 서로 간의 의미 격차로 불필요한 오해를 빚기 쉽다.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단어를 신중하게 쓰자는 것. 혹여 쓰게 될 때는 내 나름의 정의를 명확히 전달하자는 것. 그래서 힘세고 오래가는 사랑에너지가 세상에 폭신하고 말랑한 작용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잘못된 오해로 눈물이 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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