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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Jan 29. 2022

영화 루시 리뷰: 깨달음의 궁극

뇌 100%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사람은 유한한 몸을 가진 초월적 존재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까를 골똘히 고민하며 내가 힘이 드는 것이 몸의 문제일까, 마음의 문제일까, 혹은 의식의 문제일까를 고민한 적이 있다. 어디를 고치면 나아지는가 하는 문제의식은 사실 사람을 조각조각 분절시키고, 어딘가를 수리하면 정상화되는 개체론적인 시각에서 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닌데도, 몸과 마음이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는 상태를 '정상상태'로 규정하고 정상상태가 차질 없이 영위될 수 있도록 얼마나 애써왔던가. 


  몸과 마음, 의식은 연결되어 있다. 경험적으로,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픈(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프기도 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혹은 의식의 각성으로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사람은 유한하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비록 몸은 유한하고, 마음은 유한한 몸과 더불어 단기적이고 즉각적인 쾌락을 좇아 일렁이지만, 의식의 무한한 깨달음이 유한한 몸과 마음을 성장의 영역으로 이끌어주기도 하기 때문에. 


 의식 성장은 무엇인가. 의식이 성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무게를 달 수도 없으며 따라서 측정이 불가능한 의식이 성장했다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의식을 성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배우기도 하고, 경험하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기도 하고, 시간과 열정, 비용을 투자하기도 한다) 정작 의식 성장의 실체를 알아차리는 것은 당사자, 그리고 당사자와 가까운 이들 몇몇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 루시에서는 이 의식 성장의 형태와 양상을 뇌 사용량의 퍼센티지가 올라가는 모습으로 실체화시켜 보여줬다. 연구를 기반으로 만들었다지만, 이를 영상과 스토리로 구현해내는...!! 인간의 상상력은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영화를 통해 뇌가 각성하는 (나는 이를 깨달음의 궁극이라 이해하고 있다)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봤다. 유한한 존재로서 자신을 묶는 무언가를 탈피하고 극복하는 순간 존재는 부쩍부쩍 강해졌다. 그리고 끝내는 어디에도 없고, 또 어디에나 있는 존재가 됐다. 생존에서 자유로워졌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놓고, 영원이자 궁극이 됐다. 자기 자신이 없어졌기에 자신을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할 필요가 없어졌고, 그래서 놀라운 깨달음과 능력을 감당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존재 자체가 된 것이다. 아직 자기 자신을 붙들고 사는 나로서는 궁극의 깨달음의 끝이 약간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USB 메모리 장치로 변신해버린 그녀는 관계로부터 초연했기에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고 자신을 무로 돌아가도록 하는 형태로 드러날 수 있었겠지만, 그녀의 아름답고 멋진 모습을 기억하는 일반인(하필 스칼렛 요한슨)으로서는 그저 '아...!' 하는 아쉬움과 감탄 섞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 우리가 합리라고 말하는 것들의 모순 


 영화의 초입에서 루시는 리처드와 마주친다. 리처드는 고작 2주 만난 루시의 남자 친구. 리처드의 이름밖에 알지 못하는 상태지만 리처드는 루시를 절체절명의 위기 속으로 이끈다. 리처드 역시 의뢰받은 일을 할 때 그 일의 금전적 대가만을 확인했을 뿐이다(꽤 큰 액수의 대가 대신, 목숨을 잃게 되지만). 돈이나 외모, 순간의 즐거움 등이 동기가 되어 해왔던 많은 것들은 두려움, 공포, 위험 등의 현상과 환원된다. 루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영화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 중반 즈음 루시가 부모님과 나눴던 대화로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부모님께 사랑을 듬뿍 받고, 따스하고 안락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현재의  루시는 노출이 많고 화려한 호피무늬의 짧은 미니원피스를 입고 있다. 개성이 강하고 스타일이 뚜렷한 취향일 것으로 드러나는 복색이다. 그녀의 외모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에도 마약밀매를 업으로 하는 조직폭력배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존재에 대한 관심보다는 외모와 스타일에 반응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뇌 기능을 11% 정도밖에 쓰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의사결정방식이 여기에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 같지만, 합리라고 말하는 것의 바탕이 돈, 외모, 공포, 관계, 생존, 감정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무엇이 합리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목숨을 잃는 것에 비해서는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돈, 숱한 이들에게 감탄을 자아내는 외모(그러나 외모가 주는 감탄은 한순간뿐이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 어쩔 수 없이 참고 행해야 하는 역할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관계나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해 목숨을 내던지는 관계들이 과연 존재의 내면을 성장시키거나 빛나게 하는 결정을 이끌 수 있는 것일까? 

 - 리처드는 돈에 눈이 멀어 가방을 미스터 장에게 건네주는 소임을 수락한다. 그리고 죽임을 당했다. 
돈은 그에게 합리일까? 


- 루시는 남자 친구인 리처드와의 관계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리처드를 쉽게 뿌리치지 못하고 계속 거절의 말을 하다가(몸은 뿌리치고 떠나지 못했다) 원치 않는 가방을 미스터 장에게 건네는 소임을 떠맡게 된다. 남자 친구와의 관계는 그녀에게 합리였을까? 


- 미스터 장은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배를 허락 없이 가르고 마약 운반책으로 일할 것을 요구한다. 미스터 장에게 돈은 타인에게 강압을 가할 수 있는 합리일까? 


- 루시 이하 3명은 미스터 장이 목숨을 담보로 가하는 압력에 못 이겨 억지로 마약을 뱃속에 넣고 운반해야 하는 의무를 행해야 한다. 공포는 그들에게 합리인가? 목숨은 그들에게 원치 않는 행동을 이어나가도록 하는 합리인가? 


- 미스터 장은 자신의 계획을 어그러뜨린 루시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 수십 명을 잃을 수도 있는 복수를 자행한다. 루시에 대한 분노는 미스터 장에게 합리인가? 복수는 미스터 장에게 합리인가? 


 내면의 존재가 귀하다는 것을 알고 본다면 영화 속 스토리에서 숱하게 일어나는(물론 이런 역동 때문에 스토리가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감정과 행위가 만드는 현상은 일종의 허상이다. 피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만 하도록 이끄는 장치들이 영화의 스토리 속에는 참 많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 고 의미 부여하는 것 역시 존재를 놓고 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허상일 뿐이다. 물론, 허상임을 알아차리고, 그로부터 초연해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루시의 뱃속에서 루시를 각성시키는 CHP4(신종마약이자, 태아를 폭발적인 속도로 성장시키는 화학물질)일까? 


# 각성은 용기로부터 시작된다 


 루시가 처음으로 각성했을 때, 그녀는 그녀의 내면에 차오르는 힘을 느꼈다. 그리고 죽음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던 태도에서 지금의 상황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태도로 변했다. 이는 단순히 그녀가 힘이 세어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용기'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뇌의 각성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깊은 뇌 속의 사정을 나는 알 수 없지만, 몸을 익숙하게 쓰는 법도, 상대를 제압하는 법도 한번 배어보지 못한 루시가 건장한, 그것도 조직폭력배의 일원을 때려눕혀보겠다는 마음길을 내는 것은 자동으로 이뤄질 리 없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의 상태가 그저 고분고분하게 마약을 옮기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고, 자신이 행위의 주체로 능동적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됐다. 뱃속의 무언가가 몸에 흡수되는 것이 내 몸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아마도 공포는 그것이 두렵고 무서운 일이라는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확신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행위의 주체가 된 장면부터, 뇌 각성의 거대한 스토리는 시작된다. 


#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다 


 체내에 흡수되고 있는 CHP4는 루시의 몸속에서 가공할 만한 각성을 일으킨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뇌과학의 권위자 노먼에게 "제 세포는 마지막 세포핵을 열면서 CHP4를 흡수할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때에는 몸을 어느 정도는 컨트롤할 수 있을 상황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루시는 자신에게 주어진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수용할 의지를 낸다. 뇌의 기능이 점차 활성화될 때마다 느껴지는 새로운 감각, 지식, 어마어마한 정보와 능력들을 감당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저항이 수반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건 사족이지만, 사주카페에서 들었던 점괘(?)가 기억난다. 

"당신이 알았던 그 사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작은 사람이야. 그 사람, 돈돈돈 한다고 했지? 그런데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지면 아플 사람이라니까." 


좋은 것도 과하면 독이라는 것을 안다. 사실 좋고 나쁨이 없다.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해석일 뿐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해야만 하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가 우리 삶에서 각성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지, 혹은 고통으로 받아들이게 하는지를 판가름할 뿐이다. 루시는 이 급격한 변화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자기 앞에 놓인 길을 거침없이 밟아간다. 


#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어 


루시는 새고 있는 뱃속의 약물을 제거하기 위해 한 병원에 쳐들어(?) 간다. 한창 수술 중인 의사들 앞에서 수술가운을 걸치고 수술대에 누워 "나를 수술해"라고 요구하는 그녀의 모습은 상식적이지 않다. 게다가 "지금 수술 중이오" 하고 말하는 의사의 말에 수술 중인 환자의 현황판을 들여다보다 환자를 총으로 쏘아버린다. 

"이미 암 전이가 심해서 살 수 없는 사람이었어." 


 다소 충격적인 장면이었는데, 루시가 자행한 살인을 놓고 보았을 때, 그 행동을 과연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이 엇갈렸다. 사실 영화의 한 장면이며 굳이 정당화해 가며 주인공 편을 들을 필요도, 혹은 불편하게 느껴 가며 윤리의식을 가다듬을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뇌 각성이 일어나고 했던 루시의 행동에 의미부여를 해보고 싶다. 


- 루시는 자신이 살고자 이미 살아있는 한 생명을 죽인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을 보면, 루시는 있고도 없는 존재가 됐다. 그녀가 자신의 실체를 버리고 선택한 '지식의 전수'는 그녀 자신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다. 


- 그렇다면, 자신을 위하지 않은 선택이라면 한 생명을 죽여도 괜찮은가?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한다면, 우리는 '죽음'과 '죽이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 더 들여다보아야 한다. 아마도, 현실 세계에서 루시는 그 행위에 대한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처벌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위가 필요하고 옳았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대급부(그것이 행정적 처벌이건, 누군가의 슬픔을 전이받는 일이건,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건) 감당해야 한다. 

 뇌가 각성된 루시는 영화 속에서는 처벌은 피할 수 있고, 슬픔에 대한 전이나 죄책감 등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영화 속 대사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요.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아요. 감각은 미세한 부분까지도, 오래 전의 감각까지도 생생히 깨어나요. 기억나요."라고 말하는 그에게 감정은 무엇이며 감각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살인이라는 행동에 대해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을 잠시 멈추고, 두려움과 죄책감을 들여다본다. 살인을 둘러싸고 행위에 대해 판단하고 싶은 마음의 실체란 무엇인가. 죽이는 행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일지 모르겠다. 사람에겐 죽음이 왜 그토록 두려운 일인 것일까  


# 존재가 100% 각성하면 일어나는 일들 


 신체가 무너져내리기도 하고, 머리가 길었다가 짧아졌다가, 시간을 초월해 미래나 과거로 이동하거나, 세상에 떠다니는 정보들을 자유자재로 탐색하기도 하고 건장한 사내들을 천정에 붙여놓기도 하고, 흉폭한 원수를 한칼에 제압하기도 하는 루시의 행보는 각성한 존재가 가진 무한한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감정이나 표면적인 외양이 사실은 우리의 유한성에 직면하게 하기도 하지만, 직면 경험을 무의식에 깊게 뿌리내리게 하여 나를 가둬두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하기도 한다. 뇌를 100% 각성시키는 방법도,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지도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영화 한 편일 뿐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외모가 나를 붙잡아두거나, 용기를 내지 못해 나를 주저앉아있도록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며, 조금은 나를 믿어봐도 괜찮겠다는, 나는 내 뇌의 10% 정도밖에 쓰지 못하는 상태지만, 그럼에도 각성한 뇌와 내 뇌의 근원은 같은 것이기에 조금씩 느리게라도 내 존재의 무한한 힘에 가까이 다가가 보자는 생각을 해 보게 한다. 


"신종마약의 유통 과정에서 일어난 초인의 탄생" 그리고 뇌의 잠재력에 대한 영화 한 편을 보며, 누군가는 스칼렛 요한슨의 액션 장면이나, 상상력에 기반한 어마어마한 뇌의 잠재력을 어렴풋이 실체화해서 보았다고 느꼈을 사람도 있겠다. 나는 잠자는 상태에서 잠재력 위에 살고 있던 삶과 각성한 이후의 삶을 조금씩은 그려봤다.

 개성과 취향을 겨우 드러내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던 삶에서, 의무와 두려움, 혼란이 야기하는 불안을 이기기 위해 뭐라도 붙들려고 아등바등했던 삶에서 행위의 주체로 살아가는 용기, 행위의 주체가 되기 위해 그동안 굳게 믿었던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허상임을 알아차리는 통찰, 결국은 궁극의 삶은 지식의 전수와 나눔이라는 진리. 나는 얼마큼 각성되고 있는 것일까.

영화 루시를 통해 각성에 대한 의미와 깨달음을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뭘 위해서 쓴 건 아니지만, 생각이 하나둘 정리됨에 감사한 리뷰를 쓰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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