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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Dec 27. 2023

1+1=3, 나, 너, 그리고 우리

반바퀴묵상 15 (55번, 2번) 23.12.19

23.12.19

55번

이 갈망은 정확하게 55번째 선물을 통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 그것은 더 많이 창조하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이원성과 달리 삼원성은 직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쉬지 않고 반복됩니다. 항상 자유롭고 언제나 신선합니다.


2번

1) 하나 The One가 자신을 형태를 갖춘 현현으로서 밖으로 드러낼 때 그 하나는 이원성 duality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삼중성 trinity을 창조한 것입니다. 모든 이원성은 사실 하나의 관계이며 모든 관계는 실제로 3입니다


2) 모든 존재들이 자신들의 하나 됨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선물에 중심을 둔 사람의 주위에 있는 어트랙터장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 즉,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뜻입니다.


___________________


55번 유전자키는 삶의 일의 구를 55.5로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사랑과 진화의 키다. 내 삶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나는 나와 마주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때로는 의존하기도 하고, 사랑에 의거해 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 안간힘을 쓰고, 그를 수용하는 여정에서 나를 희생시키다(55번 그림자, 희생시킴) 끝내 그러한 희생으로 각성되어 자유를 얻는(55번 선물, 시디 자유) 여정의 삶을 살아왔다.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고 의존해 왔던 관계는 언제나 허상이었다. 누군가를 곁에 붙잡아둘 수도, 곁에 있다고 안심할 수도 없다는 걸, 꽤 오랜 경험으로 알았다. 붙잡거나, 가둬두거나, 통제하는 것 대신, 있는 그대로의 그를 수용하고자 '사랑하고 있는 나'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들여다보고 발견한 나의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을 바라고 갈구하면서도 막상 내면의 깊은 곳에서는 자유를 갈망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는 이가 내 삶에 깊이 들어오면 이내 두려워졌다. 상처받을까 봐. 이 두려움을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남녀 간의 사랑뿐 아니라 인생 선후배께도, 비즈니스파트너에게도, 고객과의 관계에서도, 깊이 몰입하고 대가 없이 사랑을 느끼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과 존재로서의 공명을 나누고선, 이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멀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런 나의 패턴은 관계에서 뿐 아니라 학문탐구나 운동에서도 이어졌다. 꽂힌 학문분야나 개념이 있다면 몰입해서 끈덕지게 파고, 어느샌가 졸업을 하듯, 벗어난다. 마치 니체가 그토록 사랑했던 바그너를 비판하는 대목에서 이야기하듯.

“6년 동안이나 한 때 가장 존경했던 사람의 적으로 남아야 했던 일은 힘들었어. 그러기에는 내가 충분히 막돼먹게 생기지 않았잖아. 결국, 내가 싸워야 했던 것은 늙어가는 바그너였어. 실제적인 바그너에 관해서는, 나는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그의 상속자가 될 거야.”

 『니체 대 바그너 : 어느 심리학자의 문서 (Nietzsche contra Wagne r: Aktenstücke eines Psychologen)』 (1888).


나는 오랫동안 마치 '배신자'처럼 느껴지는 내 사랑을 힘겨워했다. 한때는 온전히 몸과 마음, 영혼까지도 다 바칠 것처럼, 기존의 나를 오롯이 그가 향하는 방향으로 바꿔가며, 며칠 밤을 새우고, 하루 24시간 중 높은 비중의 시간을 그를 향해 올인해 가며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고(장담하건대, 이러한 사랑이라면 어디서건 마음을 산다) 어느 순간 초심의 공명을 지나 보내고 나면 그가, 그리고 내가 변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로 온전히 각자의 개성과 독창성에 찬사를 보낸 다음, 서로 어우러지며 일어나는 저항, 혹은 익숙함으로 돌아가는 타성이 보였던 것이다. 어떤 너여도 괜찮아. 어떤 존재여도 나는 사랑해. 그게 사랑이야 하며 사랑을 잘 아는 척 안심시켜 놓고는, 이내 하루하루 익숙해져 가는 그의 모습에 실망하는 모습이라니.


문제야 양자에 다 있었겠지만, 이러한 내가 힘들어 나를 들여다보며 깨달은 통찰은 결국, "분리감"으로 서로를 들여다본 건 '나'였다는 것이다. 전체가 아닌, 조화가 아닌, 그저 나와 분리된 탁월성의 소유자로,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가진 대상으로 바라본 내 시선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큰 소득이다.


2번 유전자키는 말한다. "하나 The One가 자신을 형태를 갖춘 현현으로서 밖으로 드러낼 때 그 하나는 이원성 duality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삼중성 trinity을 창조한 것입니다. 모든 이원성은 사실 하나의 관계이며 모든 관계는 실제로 3입니다." 어떤 관계를 '우리'라고 생각하고 대했던 나는 하나와 하나가 만나 '너', '나', '우리'라는 삼원성을 드러낸다는 근원의 진리를 모르고 있었다. 독보적 존재인 나, 그리고 너의 유일한 존재를 인정하고, 그로 하여금 창발 되는 '우리'가 서로의 독자성으로 하여금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창발에 창발을 만들어갈 때, 너와 나를 굳이 분리해 '너는 이러이러하니까'라는 시선으로 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임을. '우리'의 근원에는 자유와 신선성을 보유한 '나'와 '너'가 있어야 함을. 그리하여 '우리'는 창발의 결과이며, 이 관계의 근본에는 자유로운 너와 내가 존재해야 함을, 또한 우리를 만들어내는 여정에서는 너와 나가 다르지 않음을 깊이 깨달은 가운데 각자의 독보성을 허용해야 했다.


관계로 만들어지는 집착은 '우리' 만을 우선할 뿐, 너와 나의 독보성을 말살시키려 한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을 말하는 전체주의 혹은 고 맥락적 사회의 함의는 사실 따지고 보면 모순이다. 구성원 하나하나가 모여 창발 된 특수한 유기체가 '공동체'가 아닌가.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각자의 자유가 담보되야 하지 않느냐 말이다. 또한 그 자유를 담보한다는 말의 뜻은 공동체가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자유를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상태에서 모여 하나의 유기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존재들이 자신들의 하나 됨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선물에 중심을 둔 사람의 주위에 있는 어트랙터장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 즉,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뜻입니다.


2번 유전자키의 시디는 '하나 됨'이다. 하나 됨을 아는 독보적 존재는 결국, 누구와도, 어떤 조직이나 모임과도 하나가 될 수 있는 존재다. 그저 친밀하게 될 수 있는 존재를 넘어 전체를 바라보며 모두가 전체와 어우러져 따로 또 같이를 행할 수 있는 케미를 창조해 낸다.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는 어디서나 매력으로 사람들을 융화시킨다.


너와 나를 투명하게 인식하고, 진실하게 존재하는 가운데 창발되는 '우리'를 조화의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면, 그 에너지 장에 존재들은 반드시 공명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깨달음인가. 존재는 어떤 포장도 할 필요가 없다. 서로의 다름이든, 같음이든, 하나의 장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룬다. 그 여정에서 그 어떤 것도 잘못될 것이 없으며, 나의 기분이 어떠하건 우주는 온전히 해야 할, 이뤄져야 할 방향으로 존재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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