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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Jul 29. 2020

내 몸, 밥값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소소한 움직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며 어딘가 헛헛한 날, 스스로를 달래듯 혹은 푸념하듯, 때로는 든든하게 먹고 싶은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튀어나오는 말.


 어쩌면 '먹고' '사는 일' 이 인생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먹고' , '사는' 삶을 관찰하고, 그러면서 나의 '먹고' , '사는' 삶을 덧대 보기도 했다. 의식적인 노력을 의도적으로 반복할 때 내면에는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에게 가장 끔찍한 형벌은,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질문을 하나 더해보자. 우리가 하는 일에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 은 누가 판단하는 것일까. '가치 있는 삶'과 '가치 없는 삶'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우리는 '잘 살기 위해' 삶의 가치관과 방향성을 정하고, 삶의 시간을 살아낸다. 하지만 각자가 정한 가치관과 방향성이 정말 '잘' 살기 위한 정답 혹은 현답 일지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검열과 성찰 없이는 감히 확답을 내릴 수 없다.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아주 직관적인 먹고사는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한다. 4년 전, 나는 인생 첫 다이어트를 시작하기로 결심했고, 다이어트 한약을 먹었다. 놀랍게도 1달 동안 4킬로 정도를 약의 힘으로 감량할 수 있었고, 어렵게 뺀 몸무게를 유지하고 싶어서 다이어트 약을 먹은 기간 이후에도 운동과 식단을 이어갔다. 그래서, 3개월간 6킬로를 더 뺐다. 그러니까, 10킬로를 뺐다. 매일 몸무게를 재며 조금씩 줄어드는 체중을 체크하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성과지향적 인간이다 보니, 목표한 몸무게만큼 체중을 줄이는 것에 몰입해버렸다. 어느 날엔가, 나는 키가 168cm인데 50킬로 이하의 몸무게를 만들어보겠다는 위험한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목표가 이 지경이니, 먹고사는 것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몸무게와 관계없이 여전히 일을 했고, 삶은 이어지고 있었지만 못 먹고, 못 자고, ~ 때문에 못살겠다는 말이 늘 입에 붙었다. 예민함이 하늘을 찔렀다. 줄이고 또 줄이며 도달한 최저 몸무게는 51.9kg이었다. 몸무게는 인생 최저치를 달성했지만 내가 체감한 정신적 몸무게는 인생 최대 중량이었다. 이 때는 내 몸무게가 왜 그렇게 무겁게 느껴졌는지. 온몸의 감각이 몸매와 몸무게에 온통 쏠려 있었다. 당시엔 적게 먹어도 건강한 걸 먹자며 온갖 비싼 클렌즈 디톡스 주스와 유기농으로 재배된 채소, 고기 등을 주문해 먹고, 일주일 중 하루는 치팅을 한다며 주말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 출석체크를 했다. 엥겔 계수가 높아졌다. 지출의 대부분이 식비로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 밥값은 전혀 하지 못했다. 기업교육 강사로 일하고 있었던 나는 의뢰가 들어온 강의를 겨우겨우 쳐내듯 진행하고, 쉬는 시간에는 현기증이 나 주저앉아있었다. 요가를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늘 기진맥진이었다. 모든 일에 있어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연발해야만 했다. 떨어진 체력으로는 모든 것이 챌린지 그 자체였다.


 먹고사는 일의 본질에는 삶의 가치가 들어가 있다. 대충 먹고, 대충 살자고 귀한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사회적 존재인 우리는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망 속에 살아가고 있고, 관계망에 따른 역할과 쓰임이 있다.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것이란 때론 나에게는 성취감으로 작용하고,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을 받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역할조차 '나만 좋은' 역할은 없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먹고사는 일도 더불어 사는 와중에 이루어진다. 다만, '먹고' '사는' 행위는 전적으로 내 몸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다.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어도, 누군가와 같이 살아도,  먹는 음식이 내 몸속에서 영양분이 되고, 움직임을 만드는 에너지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작용이다. 그러니까 내가 잘 먹고 잘 살아야 내 역할을 잘 해낼 수 있고, 역할을 둘러싼 관계가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 나는 인생의 한 시점에 '다이어트'라는 미명 하에 이 연결과 관계에 대해, 내 역할에 대해 망각했었다. 수치화된 결과에 치우쳐 나를 학대했다. 나중에는 '다이어트를 위한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고달픔이 이어지는 나날들, 기력이 없어 만성피로를 달고 살면서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던 도중,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렇게 살다간 죽겠는데."


어쩌면 몸이 걸어온 말을 내가 그제야 알아듣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서 입에서 중얼거리듯 나온 말은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엄마가 해준 밥이 그리웠다.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고, 집 앞 하모니마트에 이끌리듯 나가서 애호박과 두부를 사 왔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남은 애호박은 계란물을 묻혀 호박전을 부쳤다. 금방 한 밥에 엄마가 해준 것 같은 밥상을 눈앞에 두고서, 눈물 젖은 밥알을 씹으며 엉엉 울었다. 어릴 적 엄마가 해준 밥을 건강하게 먹고 자란 나는 튼튼하고 씩씩하게 움직이는, 잘 웃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정성이 몸에 담겨서,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담뿍 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야무지고 똑똑하게 공부하고, 배운 걸 조잘거리며 여기저기 전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게 내 몸이 나에게 전한 밥값이었다. 두부 한모에 2300원, 애호박 하나에 1500원.  계란 하나 500원. 김치랑 쌀밥을 대충 계산하더라도 만원이 채 되지 않는 밥을 먹고 나는 행복이라는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온갖 비싸다는 단백질 셰이크와 유기농 채소, 자연방목으로 사육된 동물들의 고기와 프리미엄 딱지가 붙은 견과류 등등을 먹으면서는 전혀 그 가치를 해내지 못했다.


"먹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 이 다이어트의 본질이다."


날씬해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날씬해진 몸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목표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은, 날씬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을 날씬해진 몸으로 하고 싶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우리는 날씬해진 '상태'에 집중한다. 그러나 삶의 본질은 어떤 몸을 가졌건 생각과 말과 행동에 기반한다. 그리고 내가 먹는 밥의 값은 삶으로 드러내야만 한다.


이 매거진에 담고 싶은 내 철학은, "밥값을 하는 움직임"에 관한 것이다.

조금 더 건강하게, 조금 더 예쁜 나,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되는 여정에 '어떤 상태의 나'가 아닌 '어떻게 움직이는 나'를 담아내자는 것이다. '되고 싶은 나'에 명사가 아닌 동사를 담아보자는 것이다.


나는 건강해졌다. 마음의 건강에 주안점을 두고, 몸을 움직였더니 건강해졌다. 그리고 건강해진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존재 의미는 사랑받기 위함이 아니라, 내 역할을 하는 것에 있다. 내 역할을 잘하다 보면 사랑받을 수 있다. 아니, 이미 충만하게 받고 있던 사랑을 느끼고 그에 반응할 수 있다. 내 역할을 잘 해내는 나를 찾아가다 보면 바르고 생기 있고 건강해진다. 역할을 잘하는 다이어트는 어떤 다이어트일까? 차근차근, 내가 삶에 더한 '움직임'으로 풀어내 보고자 한다. 당신이 보지 못했던 다이어트 이야기. 하지만 더 풍요하게 살아내는 삶을 이야기하는 이야기. 내 이야기가 당신의 역할을 해내는 삶에 작은 응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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