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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Jul 29. 2020

비를 맞으며 걸었다

잊고 싶은 감정들은 비에 씻겨 내려가고

새벽 2시 반에 잠에서 깼다. 드물지만 가끔 이럴 때가 있다. 할 일이 많아서 각성이 빠르게 올라오는 날. 혹은 감정이 마구 밀려오는 날.


할 일이 많은 날은 할 일을 하면 된다. 적당히 각성이 되어 있고, 할 일이 끝날 때까지 잠들기는 쉽지 않으니까. 어려운 건, 감정이 밀려오는 날이다.


감정은 과거의 이야기를 한다. 왜 그때 그렇게 했는지. 그때 그랬던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나를 어그러진 거울에 비추며 나무라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그러다 왠지 내가 불쌍해져서 위로해주기도 한다. 엄마랑 조금 통화를 하다 - 엄마는 새벽 귀가 밝아서, 이런 때는 내게 늘 든든한 멘토가 되어준다. 고마운 인연. 물론, 싸울 때도 있지만. - 빨래를 돌리고 글을 쓰다 보니 아침이 됐다. 과거의 미련을 뒤로 돌리는 데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제일이다. 빨래를 돌리며 조금은 기분도 되돌렸다. 글 한 꼭지를 쓰는데 두 시간이 갔다.


운동을 하러 갈 시간이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쏟아졌다. 묘하게 기분이 상쾌해졌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덕에 비를 흠뻑 맞을 수 있었다. 운동 후라 땀에 젖은 몸이 비 맞기에 부담도 없다.

새벽의 감정들과, 애써 돌리려 억지로 상쾌해진 기분, 운동 후의 뿌듯한 성취감들이 버무려져 비를 타고 흘렀다. 어릴 때는 비를 맞는 걸 그렇게 싫어했는데, 처량해 보여서. 지금의 나는 왠지 처량하지 않다. 처량하고 처량하지 않고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었나.


언젠가 우중 러닝을 하고 싶었는데 오늘은 왠지 달리고 싶지 않아서, 집으로 가는 길을 최대한 멀리 돌아 돌아 비를 맞으며 걸었다. 모자가 흠뻑 젖고, 옷자락이 흠뻑 젖고, 양말이 흠뻑 젖었지만 감정은 씻겨 내려갔다. 이제 남은 감정의 흔적을 씻어내기 위해,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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