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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Apr 05. 2021

모두에게 좋은 사람보다,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당신과 나의 관계는.

 살다 보면, 결이 맞는 사람도, 가까이 다가가기엔 자꾸 따끔거리는 사람도, 한때 결이 맞는 줄 알았지만 지나고 보니 아픈 사람도 많다. 좋은 사람이  은 만큼 아픈 사람도 많다. 그런 때는 그저  좋은 것으로 믿고서 만나는 사람의 모수를 늘리면 좋은 사람을 만날 확률이 아진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기에, 타인이 보여주는 아쉬운 모습만을 그의 전체로 믿기보다는 그가 보여주지 못한 숨은 좋은 모습을 기다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었다.


 좋은 면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가치관으로 사람을 만나다 보니 다들 좋았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게 분명한데도  사람의 입장과 관점을 어쭙잖게 쓰고서 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스르륵 이해가 가고 헤아려지는  같았다. 세상엔 각자의 관점에선 나쁜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가장 나쁜 건 나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나의 보이는 모습 이면의 나만 아는, 숨겨두고 싶은 부끄러운 모습을 가장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나를  숨겨놓고, 동여매 놓고,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만 맞추는 패턴이 버릇처럼 행동에 심어졌다. 어쩌면 삶에서 만난 많은 문제들이  패턴에서 나온 건지도 모른다.


친절하다가 - 꾹꾹 참으며 헤아렸다가 -  이상 참지 못해 화를 버럭 내고서(상대는 매우 깜짝 놀란다) - 후회하며 부끄러운 나를 부여잡고  이상은 안 되겠다며 그를 떠나버리는 형태의 관계 패턴을 반복했다. 상대를 좋은 사람으로 믿고 그의 의도치 않은, 혹은 부주의한 마음씀에 내가 아플 때마다 이 같은 패턴을 반복하다 보니 많이 외롭고 헛헛해졌다. 어쩌면 좋지만 대하기에 아픈 사람은 사실  인간관계의 전부였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행동이라도 내가 아프면 아프게 받아들여지고, 내가 즐거우면 이 정도쯤은 괜찮아하고 넘길  있었다. 차라리 치명적인 흠집이 있어 관계를 끊기로 결정할  있는 상황이라면 쉬웠지만, 아주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는 내 상태에 따라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굴 때도 있었으니까. 소중한 사람들조차도 의도 없이, 몰라서 나를 아프게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니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있기도 하다),  사람의 행동을 괜찮게 받아들이는 건강한 어딘지 아픔을 쉽게 느끼는 부족한 가 이 상태 저상태를 오가며 관계의 간격을 좁혔다 넓혔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건강해도, 모든 사람을 좋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건강한 감수성에도 자꾸만 걸리는 결의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과는 여간해서 친해지기 어렵다. 다양한 스펙트럼과 나와의 궁합을 두고 사람을 대하다 보면, 그저 친절한 것이 편하구나 하는 통찰이 온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두루 친절을 전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온 마음으로 전하는 친절과 내가 편하자고 친절을 가장한 행동은 전하는 주체인 나로서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진심을 전하고 싶을 땐 진정으로 행동에 마음을 담는다.


모처럼 주말에 새로운 인연과 감사한 이들을 듬뿍 만났다. 정도 듬뿍 충전하고, 깊은 이야기도 나누었다.  


"예림 씨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좋은 사람인 건 분명한데 모두에게 좋은 사람인지, 정말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인지는 두고 봐야겠어요. 그러니 모두에게 말고 나에게 다정해 주세요."


그리고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이런 메시지를 받으면 각별히 잘 대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는 건... 내가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뜻이다).


의미 있는 관계는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운명이 허락하는 깊이와 방향이 어디일지 알아차리고 순리대로 인연을 쌓아가는 법에 대해서는, 삶 살이에서 좋은 인연을 배우고 있는 나로서는 아직 많이 서툴다.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관계를 쌓아 나갈 때는 신중하게, 기분보다는 존재의 본질에 마음을 두고, 잘 보이려는 욕심은 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전하며, 기분이 흔드는 행동보다 상대를 존중하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마음을 섬세하고 진중하게 잡아두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진심은 짧은 시간 동안에 전달되는 것도 아니고, 의미는 한순간에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만남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다정한 나' 보다는 '진심인 나'가 되고 싶다. 진심이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는 관계의 주파수를 맞춰서 만남을 쌓아 나가 봐야 알 일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 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그리고 불가능할 것을 알기에, 아마도 모두에게 좋고 싶은 마음은 그저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욕망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가 전하는 '좋음'의 주파수조차 모두 다르다는 것을. 만난 이들의 귀함이 각자 다르듯.


자신의 귀함을 알고 귀함을 다루면서 상대의 귀함도 발견해 줄 줄 아는 사람에게 진심이고 싶다. 귀한 나를 상대에게 온전히 전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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