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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Apr 09. 2021

나는 왜 사나

당연하고 뻔뻔하게 홀로. 고맙게 반갑게 함께.

 글을 쓰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생각과 고민이 많아졌다.
 '나는 왜 쓰나. 나는 왜 생각하나. 나는 왜 읽나. 나는 왜 사나...'


 생각해보니 이런 고민들은 아주 낯선 것만도 아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늘 고민했었다.

 '엄마 아빠는 나를 왜 낳았나. 말도 안 듣는데. 나는 왜 태어났나. 엄마 아빠의 말을 잘 안 듣는 딸은 필요가 없는 건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인가..."  


요즘은 '외로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곁에 누군가가 있을 때, 누군가의 곁에 있고 싶을 때. 그 사람의 본질을 보기보다 내 안의 외로움을 달래려 했던 목적이 컸다. 가슴속에 사랑이 매우 고픈 귀신이 살듯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왜 그토록 혼자가 힘들었을까.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내 존재 이유는 따로 인정받거나 증명받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도 나는 누군가로 하여금 끊임없이 내 존재 이유를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혼자 집에 웅크리고 있는 시간에도 세상은 잘 돌아갔다. 굳이 이 세상에 내가 있는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었는데(아무것도 안 할 때는 정말이지 찾을 수도 없었을 텐데) 누군가로부터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하는 피드백을 받고 싶어서 안간힘을 썼다. 성향적으로 인정 욕구가 큰 사람이라 그런가 했다.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피드백을 넘어 내가 꼭 있어야 한다는 피드백을 받아야 안심이 되겠기에, 나는 세상에 끊임없이 맞췄다. 그냥 맞춘 것이 아니라 아주 탁월하게 맞췄다. 어디서나 만족도가 높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찾아주는 사람이 많아지고, 일에 대한 의뢰도 많이 받았고,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러나 나는 왠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불안하고 안심이 되지 않아서, 오히려 외로움에 심취해 불안한 마음을 만나보려고 했다. 내가 기대려고 했던 타인들은 모두 나처럼, 각자의 삶 속에서 외로움을 이고 지고 살고 있었다. 살면서 놀랐던 것은, 모두가 비슷한 형태의 외로움이 만드는 그늘 아래 살아가지만,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외로움의 본질을 탐구하며 몸서리치면서, 외롭지 않기 위한 시도와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루는 생각하기에 따라 쉴 새 없이 흘러간다. 끼니를 채워가며, 살기 위해 밥벌이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그때 그때 살면서 만나는 자극에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까무룩 하루가 간다. '보통 사람들' 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산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너무 많이 간 것 아니냐." 하는 답을 듣곤 했다. 이런 답을 들은 후면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냐며 탄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탄복 후에도 대화는 겉돌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기대려는 노력도, 대화를 나누며 외로움의 실체를 탐구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게 됐다. 하지만 책은 읽었다. 그러면서 나는 팔자가 좋게도 먹고사는 삶의 압박에서 비껴 서서 먹고사는 고민이 아닌 '삶'의 고민을 했다. '나는 왜 사나.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 왔나. 사람은 왜 외로운가....' 가끔, 사유의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무척 반가워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삶은 고통스럽고, 외롭고, 슬픈 본질을 지니고 있는데, 삶의 사막을 건너는 도중에 아주 간헐적으로 오아시스 같은 사유를, 사람을 만나면 어찌나 고맙고 반갑던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하게 불평하지 않고 삶을 견뎌내고 있고 , 이로써 현존의 가치를 믿고 있다. (...)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보통 사람에게 삶의 가치란 오직 자신을 세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기초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앓고 있는 심한 공상 결핍증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느낄 수 없으며 ,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운명과 고뇌에는 가능한 한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반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운명과 고뇌에 관여할 수 있는 자는 삶의 가치에 절망할 것이다. 만약 그가 인류의 총체적인 의식을 자신 속에서 파악하고 감지할 수 있다면 , 그 사람은 현존을 저주하면서 쓰러질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전체적으로 아무런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은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아 그 속에서 위로와 의지가 아니라 회의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 프리드리히 니체 중에서 - 




 외로움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해 위해 삶의 즐거움에 기꺼이 시선을 돌린다. 의식주 안에서 허락되는 내 취향에 맞는 것들과 따뜻하고 고마운 관계들이 외로운 삶의 갈증을 견딜 수 있는 오아시스가 된다. 그러나 삶 속에서 존재의 본질에 대한 판도라의 상자를 연 이상은, 더 이상 회피하면서 살 수는 없다.  즐거움을 찾아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다가도 나는 이내 내 안의 냉랭하고 고독한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차갑고 쓸쓸한 세계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돌아올 수밖에는 없다. 외로움을 피하는 방법보다는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존재로서의 나를 생각한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이룬 후에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고, 절제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외로움에 대한 사유가 깊어진 후로는 인기가 많아지는(타인으로 하여금 내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기꺼이 혼자가 된다. 함께 있더라도 혼자인 영역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상대에게 내 존재로 하여금 느껴지는 기쁨을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내 존재로 하여금 느낄 슬픔은 진작부터 굳이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었는데. 오히려 확인이 되면 미친 듯이 불안했을 텐데. 타인을 기쁘게 하는 나만 여기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이 있건 없건, 내가 어떤 나이건, 여기 있어도 된다.
 다만 홀로 여기에서, 내가 가진 빛을 어떻게 세상에 드러낼지를 생각하는 것은 퍽 외로운 일이다. 꼭 누군가를 비춰야만 빛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아니다. 그럴 때는 '여기 있어도 되나'를 생각할 필요 없이, '여기 있는데, 이미 있는데 어쩔 거냐. 모르겠다 드러누워버려야지.' 하고 뻔뻔하게 혼자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외로운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버리면 조금은 쉽다. 그래서 요즘은 외로움을 당연하게 여기며 만나고 있는 중이다.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는 '희망' 이 있었다지 않았던가. 이 지독한 외로움 밑바닥엔 '당연한 외로움'을 받아들이게 하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상대가 아닌, 곁에서 각자의 외로움을 감내하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 마라톤 코스에서 옆지기가 주는 안도감이 희망이다. 홀로 미로를 헤매다 마주치는 외로운 영혼들이 희망이다. '나는 왜 사나' 하는 자다가 옆구리 긁는 고민은 집어치우고 홀로 걷는 길에서 만나는 희망들에게 잔뜩 반가움을 전해야겠다. 어쨌거나, 나는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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