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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Feb 18. 2020

몸으로 타인 이해하기

운동심리학 기반 감성공감에세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로 시작하는 CF송을 기억하는가. 초콜릿으로 감싸진 보드라운 머쉬멜로우 케이크의 포장지에는 한자로 '情' 이라 씌어져 있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어떤 외국인은 '정' 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혹은 느껴야 하는 무언가가 교감을 이루기도, 혹은 큰 오해를 만들기도 한다. 한국인은 왜 '정' 에 약한가. '정' 은 무엇인가. '정' 이 생기고, '정' 을 나누다, '정'이 뚝 떨어지고야 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우리는 타인을 그와 함께 보낸 '시간' 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냥 보면 숱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지만, 두고 보면 그 사람의 모습과 행동이 마음에 들어온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 이라는 시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는, 흔한 욕구일 것이다. 보편 타당하게 사랑받고 싶은지, 소중한 특정 누구에게 사랑받고 싶은지, 대상과 정도가 다를 뿐. 서점에 가보면, '어떻게 누군가에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은, 그에 대한 나름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사랑의 정의를 내린, 혹은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존재론에 입각한 조언들까지 수많은 표지와 제목, 일리있는 컨텐츠를 담은 이야기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다. 그렇게나 많은 Know-why와 Know-how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랑받고 싶은 이들을 위한 사랑의 방법과 의미를 논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까닭은 어찌 보면 사랑은 글로 배우는 것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함께 보낸 시간의 깊이다. 


 사람의 마음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는 언어를 쓰기도 하고, 표정, 행동, 비 언어적 요소를 관찰하기도 한다. 사랑, 우정, 배려, 신뢰 등과 같은 관념적인 가치들을 이해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과정에서 상대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은 그를 내 삶에 담아볼까. 하는 의지가 행동으로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 같은 상황을 가정했을 때 '나라면' 이라는 전제로 드러나는 행동과 비슷하다면, 그와 나의 심리적 관계는 무척 가까워진다. 서로 비슷한 반응과 비슷한 행동을 드러내는 이들일수록, 서로에 대해 공감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어쩌면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은 살아온 문화역사적 맥락이 비슷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공통점을 많이 찾은 서로는 친밀감도 그만큼 많이 느낀다. 거울뉴런, 미러링효과, 공통점 효과라고 불리우는 심리적 실험의 결과가 그를 뒷받침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반응이 나의 그것과 전혀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공감과 친밀감은 발생한다. 단지 내가 그러한 반응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 그의 의도와 감정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때 그러하다. 서로의 삶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도 다르다. 나와는 다른 상대의 반응을 관찰하며 반응에 대한 납득이 이루어지면, 그와 같은 반응에 대해 학습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함께 새로운 정보, 자극, 상황에 대한 반응을 공유한다는 것은 신체성이 동반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정보, 자극, 상황이건 사람이 반응하는 방식은 신체에서 기인한다. 각자의 '몸을 쓰는 방식' 이 함께 보낸 시간과 함께 정반합을 이루고, 비슷해지고, 새로운 방식으로 재편된다. 관심이 깊어지면, 그에 맞는 반응 역시 깊어진다. 말 그대로 '말하지 않아도 아는' 교감이 이루어진다. 



교감하고 싶다면 함께 움직여라


 빨리 친해지고 싶다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상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린다. 상대의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움직임이 드러나는 맥락을 이해한다. 필요하다면 상대의 몸을 쓰는 방식을 배운다. 굳이 배우지 않아도, 상대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상대의 몸쓰는 방식을 사용해 상대를 배려한다. 여지껏 우리가 친해지기 위해 했던 방식이다. 함께 움직이면 금방 친해진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면 포지션이 다르더라도, 움직임의 내용이 다르더라도 교감이 이루어진다. 운동을 하거나, 여행을 가는 것, 커뮤니티 등에서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보내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친밀감을 올리는 방법으로 많은 이들에게 꼽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서로의 삶에 '신체성'을 동반한 문화역사적 맥락이 생기는 과정을 경험하며,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을 맞추는 시간을 통해 신뢰와 공감대가 싹트는 것이다. 빨리 친해지고 싶어서 함께 움직이는 것이건, 함께 움직였던 경험이 좋아서 친밀감이 쌓이는 것이든, 당신 주변에 친밀감이 형성된 과정에서 '신체성' 은 반드시 동반된다. 펜팔 친구나 스카이프 친구,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으로 이어진 '느슨한 연대' 조차도, 한번 얼굴을 본적 없는 이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비슷한 삶의 현장이나 행동양식에 대해 공유하며 친해진다. 직접적으로 신체성을 동반하는 경험을 나누지 않고도, 온라인에서 서로의 경험에 대한 간접적 신체성이 동반되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가 가능해지는 지점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나 관심이 있다면, 말하지 않은 것이 무언가 있다고 감지할 수 있다. 혹은 감지한 것이 틀릴지라도, 그를 따뜻하게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 몸을 '감지와 이해의 레이더' 로 써야 한다. 상대와 친해지려는 이유가 오로지 그 자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친해지는 것으로 하여금 '내가 안심하기 위해', '내가 사랑받기 위해서'. 혹은 '이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와 같은 에너지가 사용되는 순간 몸은 감지의 레이더를 내리고, 나를 지키는 것에 에너지를 쓴다. 타인과 함께 신체성을 공유하면서도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나의 주의가 타인이 아닌 '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 에 집중한다고는 하지만, '현재의 나' 가 아닌, '목적에 부합하는 나' 에 집중하게 되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도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 특정 목적에 내가 부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타자는 내가 목적에 부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지, 혹은 흔들어대는지 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게도, 나에게도 집중하지 못한 채로 그에게도, 나에게도 충만하지 못한 것에 대한 원인을 돌리고, 성향에 따라 그에게건, 나에게건 화살표를 돌린다. 누구도 내 결에 맞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나 조차도 나를 믿을 수 없게 된다. 존재의 본질은 외로움인가를 생각하면서도 참을수 없는 외로움에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타파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감각' 뿐이다. 바람직성, 학습의 내용, 목적성을 내려놓은 채, 내 온몸을 감각의 도구삼아, 상대와 나누는 시간을 오롯이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 


당신과 나는 모두 괜찮다. 


 꼭 모든 것을 알거나 모든 것을 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을 잘 하거나 잘 해낼 필요는 더더욱 없다. 중요한 것은, 내 몸이 민감하고 명확하게 감지된 것을 바탕으로 그 시점에 필요한 것들을 직접, 몸으로 적절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삶의 방식과 행동은 모두 중립적이다. 다만 개인의 해석에 따라 바람직함과 그렇지 않음이 구별될 뿐이다. 이미 구별 작업이 일어난 후에도 가치와 맥락에 따라 상황에 따른 행동의 바람직성에 대한 판단은 번복될 수 있다. 그러니까, 판단이 있건 없건, 당신과 나는 모두 괜찮다. 그 누구의 판단도, 실은 당신의 본질을 다치게 할 수 없다. 당신을 다치게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당신뿐이다. 타인 역시 마찬가지다. 외로운 삶에서 덜 외로울 수 있는 방법은, '모두가 괜찮다' 는 전제 하에 함께 움직이며 '삶의 연대' 를 나누는 것일 뿐이다. 어떻게 연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답은, 당신이 얼만큼 자신을 비우고 타인과 교감하는지에 달려 있다.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을 때 가장 많은 것을 얻게 되고,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상대를 받아 안을 수 있다. 내 삶에 켜켜이 쌓인 프레임과 잣대로 타인을 이해하려고 아무리 노력해 봤자, 그는 나일 수 없으며, '나' 라 해도 답을 줄 수 없다. 이 세상에 동일한 존재는 없으며, 그로 인해 본질적으로 느껴야 하는 고독감을 성숙하게 고독력으로 승화시키고, 주어진 삶의 문제들을 살아나가는 속에서 서로의 고독력을 응원하고, '외로움의 연대' 를 나누며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시 '함께 신체성을 공유하며 움직이는 것' 일 것이다.  당신과 공존하고 싶다. 당신의 고독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신체성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조금 더 교감이 필요한 상대가 있다면, 그와 가까워지는 방법으로 '몸으로 이해하는 시간' 을 나눠보자. 판단 없이, 오롯이 상대가 살아내는 모습을 관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반응에 집중하면서 함께 움직여보자. 몸을 가지고 사는 우리로서는 몸을 통해서만, 행동을 통해서만 상대와 공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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