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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Feb 14. 2020

'아픈 몸'으로 사는 우리에게

운동심리학 기반 감성공감에세이

 누구나 어디쯤은 아픈 구석이 있다. '몸과 마음의 건강' 을 자부하는 나도 그렇다. 어제는 하루종일 하이힐을 신고 다녔는데, 역시나 종아리 뒤쪽과 햄스트링 근육이 짧아져 몸이 뻐근하다. 몸은 그날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몸과 마음의 불균형을 통증으로 전한다. 아주 섬세하게, 혹은 조금 느리게. 

 

 바디풀니스를 공부하며 몸을 감지하는 눈이 깊어졌다.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세가 눈에 들어와, 혹시 불편한 것이 있는지 물으면, 스스로 놀라며 아주 편하지만은 않았노라는 대답을 들을 때가 잦아졌다. 불편한 심기를 참는다고는 하지만, 몸은 이내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마음의 불편함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쓰고 있었기에 부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굳이 몸이 전하는 메시지를 무시할 필요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부인하는 것이 몸과 마음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는 데 일조한다. 


 우리는 마음과 몸을 '쓴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세심하게 마음을 쓰고, 마음으로 헤아린 무언가를 행동으로 표현한다. 우정, 사랑, 배려, 관심 등은 모두 관념적인 개념이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행동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 행동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행동에 관념이 담기면 행동은 하나의 메시지가 된다. 마음에 담긴 메시지가 행동으로 연결되는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나면, 몸과 마음의 연결은 비로소 완성된다. 마음에 뜻한 바를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 편안해지면, 자유로워지고, 자신감이 생기고, 편안해진다. 행동이 전하는 메시지가 타인에게 그대로 전해질 것이라는 믿음은 자신의 마음에 대한 솔직함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스스로 솔직하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때로는 표현과 행동을 주저한다. 타인에게 받았던 오해, '본의 아니게' 라는 말로 대변되는 여러가지 상황들에 대한 경험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마음과 몸을 쓰는 나름의 방법이 있다. 방법에 대한 다양성 때문에 오해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의 메시지가 몸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의 오해나 오류는 몸과 마음을 쓰는 방법이 '달라서' 가 아니다. 자신과 상대가 주고받는 섬세하고 미세한 신호를 '놓쳐서' 다. 의외로, 더 마음을 쓰고, 더 신경쓸 때 오해가 생긴다. 그래서 '놓쳐서' 라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당신이 마음을 쓴 그 '무엇' 때문에 많은 것들에 대한 감지를 놓치게 된다. 


 혹은, 감각이 무뎌져 어쩔 수 없이 놓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 때 나는 '아파서' 라는 표현을 쓴다. 누구에게나 아픈 구석이 있다. 신체적으로 아픈 곳이 있을 수도 있고, 정서적으로, 인지적으로 아픈 곳이 있을 수도 있다. 몸은 정서적, 인지적으로 아픈 곳에도 함께 반응한다. 누군가와 말다툼할 때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거나, 내 말을 들어주는 이가 없을 때 열이 오른다거나, 모르는 것이 잔뜩인데 안심하고 물어볼 수 없는 상황에서 안압이 오른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러한 일시적 통증을 놓치고 그대로 방치하면 질병이 된다. 감지하지 못하는 새 질병을 안고 사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도 많은 것들을 놓칠 수밖에 없다. 신체적 스트레스가 늘상 삶에 동반하기 때문에, 피로도가 높고 예민해진다. 게다가 자신의 예민함을 자책하며 스스로 피로도를 높이고 예민도를 올린다.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할까. 타인은 왜 나를 불편하게 할까를 생각하는 동안, 통증은 더욱 심해진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통증은 더 심해진다. 괴로움은 더 커지는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고정적으로 쓰여지는 정신에너지가 크기 때문에, 더 노력하고 있다고, 더 애쓰고 있다고 느끼는데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실제로 그의 행동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뿐,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정신작용만 더욱 많아졌기 때문이다. 

 당신이 힘든 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프기 때문' 이다. 사실 누구나 여기저기, 조금씩 아프다. 아프다는 것은 당신의 몸이 당신의 상태를 전하는 신호가 잘 전달되고 있다는 뜻이다. 살아있는 존재가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거듭하는데 아무 자극 없이 사는 것은 외려 역설적이다. 건강함은 아프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아픔을 섬세하게 느끼고 아픔에 대한 대처를 적절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으레 "내 몸은 엉망진창이야." , "나는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야." 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있다. 아픔이나 불편함은 분명히 감지하지만 처신하지 않고 있다는 뜻일지 모른다. 혹은 몸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서, 딱히 불편한 곳은 없지만 그만큼 신경쓰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지는 막연한 걱정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도 반영된다. 내 몸은 엉망진창이라고 말해본 적이 있는가? 타인에게 배려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배려가 일방적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을까? 해준 것만 생각하고, 그 베품이 정말 진정한 베품이었음을 타인의 반응을 살피며 느꼈는가? 


 평소의 아픔을 제대로 감지하고 처신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내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병증으로 드러나게 된다. 작은 아픔마저 처신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질병이 다가왔을 때 몸과 마음은 속수무책이다. 내가 나를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몸이 마음이 원하는 바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되었기 때문에- 마음은 고통스럽다. 두렵다. 불안해진다.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내 나름대로 한다고 한 배려가 (상호작용이 아닌, 바람직하다고 배우고 믿었던 행동들이) 일방적인 행동이었고, 오히려 내 배려를 상대가 '용인' 해주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인지하고 있었던 것들이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고통이 따른다.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과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그건 내가 이기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감지가 무딜 만큼, 아팠기 때문이다. 

 조금 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내 아픔을 보듬어 안아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자신뿐이다. 아픔을 다독이고 그에 맞게 챙겨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나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구원을 기다리는 일만큼 나의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것도 없다. 타인은 그저 내가 나를 챙길 수 있도록 에너지를 나눠줄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런 에너지를 잘 받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타인은 나의 아픔을 잠시 알아줄 뿐,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아플 때의 나를 너그럽게 안아주자. 어디가 아픈지 세심하게 살피고, 아픈 곳을 소독하고, 마사지하고, 약을 발라주자. 무뎌진 감각을 다시 깨우고, 충만하게 반응하자. 몸의 통증에 세심히 반응할 수 있다면, 마음의 통증에서 이내 자유로워진다. 아침에 일어나 몸 구석구석을 눌러보며 뭉친 곳을 찾고 정성껏 풀어주면, 몸도 가벼워지고 관계에서 오는 외부자극에도 이내 여유롭게 반응할 수 있다. 몸 신호를 참지 말자. 몸과 마음의 연결을 더욱 긴밀하게 작용하도록 하자. 


 삶은 늘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다. 아픔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상이나 벌도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일 뿐. 아픔조차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가 아픈 몸을 이끌고 살며 할 수 있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픔에 충만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아픔을 빠르게 떨치려 애쓰거나 평가하고 채찍질을 일삼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그럴수록 아픔의 정도는 심해진다. 있는 그대로 아픔을 돌보면 아픔을 마주하고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는 건, 누구나 이같은 아픔을 짊어지고 살고 있다는, '아픔의 연대' 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의 아픔이 당신에게 충만함을 줄 수 있기를. 스스로 돌보는 기쁨을 통해 자유로워지기를. 누구나 아프지만, 아픔을 대하는 태도는 저마다 다르다. 아픔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고통의 정도는 분명 달라질 수 있다. 오늘도 아픈, 나와 당신이 각자의 아픔을 세심히 돌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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