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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Feb 19. 2020

익숙한 도구가
항상 탁월한 도구인 것은 아니다

운동심리학 기반 감성공감에세이 

 2008년. 회사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명품 화장품 브랜드의 국내 유통 총판 회사에 입사해 브랜드 어시스턴트로 근무하게 되었다. 인천 출신의 촌뜨기, 사회생활 새내기가 한참 핫한 어른의 동네, 학동 사거리로 출퇴근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사회생활에서 주어진 첫번째 미션은, '어색함을 극복하는 것' 이었다. 온통 낯설기만 한 환경 속에서 사수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볼 때에도, 필요한 물품을 찾아서 사용할 때에도, 처음 해보는 일을 익혀 나갈 때에도, 동료들과 점심 식사를 고르는 순간 순간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리는 어색함을 용감하게 쳐내고, 면접때 어필했던 나의 강점 - 뭐라고 했더라 내가... 아마 밝고, 긍정적이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즐겨 한다고 했었던 것 같다 - 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해내야만 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내가 맡은 브랜드 뿐만 아니라 의류, 가방, 화장품 등 유럽에 본사를 둔 수많은 명품, 패션 브랜드를 국내에 총판하는 회사였고, 선배님들의 복색과 톤앤매너는 패션피플 그 자체였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아이라인을 그리는 데 익숙해졌을 정도로 외모와 화장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 잘하지 못했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출근할 때마다 미운오리새끼가 된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루는 선임 선배에게 회의실로 불려가 그래도 명색이 패션 회사에 다니는데, 조금 신경을 써보면 어떠냐는 타이름(?)을 듣기도 했다. 선임 선배님은 내가 회사에 빠르게 적응하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해준 따뜻한 조언이었는데, 나로서는 사는 방식과 가치관을 완전히 뒤흔들게 되는 사건이자 조언이었다. 맙소사. 그동안은 '일' 의 성과와 완성도에 집중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내가 놓친 부분이 스타일링과 메이크업이었다니. 그저 재밌게만 봤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앤디는 바로 나였다. 



(똑똑한 줄 알고서 열일하려 노력했지만, 겉돌던 앤디는 2008년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던 시절의 나였다.)


 학교 다닐 때 사람과 친해지고, 능력을 인정받던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것은 회사에서는 잘 통하지 않았다. 5만가지가 넘는 화장품(특히 색조...!) 제품과 신제품 라인업에 대해 이해하는 것, 경쟁브랜드 동향,  셀럽들의 스타일링 트렌드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던 동료와 선배들 사이에서 나는 그동안의 삶의 공식들을 새롭게 학습해야만 했다. '나' 를 보여주고, '상대' 를 이해하려는 관심, 상대와 나의 공통점 등을 드러내는 대화들로 사람과 가까워지고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왔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지점이었다.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와 동료 사이에는 항상 '패션' 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고, 공통분모에 대한 관심은 그들에게서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외의 다른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패션에 관심이 별로 없던 내가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려면, 나 역시 그들과 같은 관심사를 가지는 데에 망설임이 없어야 했다. 나름대로 옷도, 패션도, 셀럽의 가십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가진 관심은 그들에 비하면 아주 가볍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그들 사이에 쌓인 공통 관심사의 깊이와 넓이, 그만큼 쌓인 관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가볍게 관심을 가지면서 접근하면 관계도 점차 깊어질 수 있었을텐데, 관계가 전제되어야만 관심도 더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다 보니 일하면서의 실수에 대해 스스로 과하게 자책하게 되고, 일을 하는 태도가 점점 위축되어갔다. 최신 패션 정보를 토대로 신제품 교육자료를 만들며 전달해야 하는 보직 상, 진심으로 브랜드와 화장품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는데, 진심과 관계없이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만들어 놓고 보니 일에 몰입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면접을 보고 합격했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소진되어갔다. 결국 6개월만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딴에는 오래 버틴 거였다. 나는 나에게 익숙했던 방식으로 회사 동료와 선배들에게 '나'를 보여주려는 시도를 거듭하다가, 그들과 같은 공통관심사를 가지는 것을 끝내 배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누구나 살아왔던 대로, 사는 대로 산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동안의 삶에서 거듭했던 방법을 쓴다. '자기다움' 은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나만의 접근방식이다. 어렸을 때 가족과 만나 이런 저런 삶의 미션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나의 보호자이다. 보편적으로 사람은 자신을 낳아주고 돌봐준 대상으로부터 자아상을, 제1보호자를 벗어나 처음 만나는 제2보호자로부터 사회상을 학습한다. 제1보호자의 역할을 보통은 어머니가, 제2보호자를 아버지가 담당한다. 낯선 경험과 마주하며 적응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개인의 문제해결방식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닮아 있다. 개인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가장 자주,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어져 왔던 방식이다. 물론,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방법 외에, 제3의 방법을 습득하고 강화해 온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의 뇌는 우리가 겪는 문제상황(어떤 문제도 동일하게 반복되어 일어나는 문제는 없지만)을 패턴화시키고, 비슷한 패턴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인식했을 때 가장 익숙한 방식의 해결방식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한 번 형성된 첫인상이 잘 바뀌지 않는 이유, 한번 형성된 습관을 바꾸기 어려운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래서 뇌를 '인지적 구두쇠' 라 일컫기도 한다. 특히 이성적인 해결방법보다 더욱 빠르게 일어나는 자동반사 반응은 '감정' 이다. 영화 속에서는 다섯가지 감정이 조화롭지만 그 중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코어 감정' 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라일리의 경우에, 코어 감정은 Joy 다). 


라일리의 감정 조종간은 주로 Joy가 리딩하고 있다. 




 

익숙한 도구가 꼭 탁월한 도구는 아니다. 


 아마도 꼭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자동으로 늘 익숙한 방식의 방법을 쓴다. 낯선 문제이더라도 뇌는 이전의 경험 속 아카이브의 유사한 해결방식을 떠올리며 상황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특히 새로운 상황에 노출되었을 때, 대응을 준비하기 이전부터 감정은 반응한다. 우리가 처음 경험하는 무엇인가를 접할 때 올라오는 감정과 몸의 반응은 그 대상에 대한 온전한 감각이 반응한 결과라고 하기보다, 그와 유사한 상황이라고 판단되는 경험을 하며 느꼈던 감정과 상태가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삶의 경험이 축적되며 계속 폭이 넓어지고, 쓸 수 있는 무기, 강점, 자원 역시 풍부해진다. 그러나 문제와 상황을 만났을 때 발동되는 나의 감정은 상대적으로 덜 유연할 수 있다. 처음 겪는 상황과 문제에 불안함이 올라왔다는 것은,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욕구가 내 안에 올라왔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내가 이러한 상황에서 불안함이라는 감정을 익숙하게 쓰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보통은 익숙하게 길이 난 감정이 나를 괴롭게 할 때, 그 감정을 자주 불러오는 기전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숨겨진 Why를 찾느라 골몰하게 된다. 때로는 찾아낸 Why가 우리를 무척 후련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Why를 찾아냈다 해도 후련하지 않은 경우도 분명 있다. 그것은 괴로운 감정이 습관적으로 올라왔기에 납득이 될만한 Why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늘 젓가락을 들고 식사하는 사람은 국물 요리를 먹을 때도 습관적으로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한다. 건더기를 먹다가 국물만 남게 되면, 젓가락만으로는 식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온다. 으레 국물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국물을 먹어야만 하는 상황도 인생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 때, '왜 나는 젓가락만을 쥐고 살아왔는가'에 대해 탐색하기보다, '왜 이 사람은 내게 국물요리를 주었는가' 에 대해 불편해하기보다 더 건강하게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젓가락만을 가지고 살아왔음을 솔직담백하게 인정하고, 다른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국물을 먹고 있는지를 관찰해 지금부터 나는 숟가락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보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젓가락을 썼던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숟가락을 써볼 수 있는 타이밍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익숙한 식기가 꼭 그 음식을 먹기에 탁월한 식기는 아닐 수도 있다




낯선 상황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왔을 때에는 '정신차리기' 를 써보자. 


"Miracles Now" 라는 책의 저자 가브리엘 번스타인의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타파하는 명상기법으로 '정신 차리라' 는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손목에 고무 밴드를 차고 다니며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밴드를 튀기는 것이다. 자동으로 올라온 감정이 나에게 악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내가 저지행동을 할 수 있게 스스로 암시를 주는 것이다. 부정적 감정은 내가 자주 쓰는, 익숙한 감정일 수 있지만, 때로 그 감정이 나를 불편하게 할 때, 그 감정이 나를 위해 탁월함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는 감정을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내 감정 길이 이렇게 나 있구나' 를 인식하고, 현재 올라온 감정길 위에서 괴롭다면 다른 길로 한번 들어서보는 것을 능동적으로 선택해 보는 것이다. 나를 흔든다 생각했던 주변 환경에 대해 관점을 달리 해보는 것이다. 외부에서 나를 흔들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익숙하게 써 왔던 감정길이 나를 흔든 것이다. 나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감정길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자주 들어섰던 길이 아니기에 장애물이 있거나, 들어서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의 감정에 반응하고 대응할 수 있는 행동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두는 것만으로도 삶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다. 



'성숙' 은 익숙한 도구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구를 채워 넣고, 사용해보며 쓸 수 있는 도구들을 늘리는 것이다. 


 사람이 여럿이듯, 상황도 여럿이다. 다시 말하지만 같은 상황은 있을 수 없고, 유사한 상황을 우리가 해석해 반응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우리 뇌는 자동적으로 경험 아카이브를 발동해 문제해결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감정과 방법들을 불러오기해준다. 참 고마운 반응이지만, 뇌가 불러오는 도구들 역시 내가 꾸려온 가방 속에서 꺼낸 것이기에, 낯선 상황과 도전에 대응하려면 새로운 도구를 사야할 수도 있다. 새로운 도구를 사는 것 역시, 내가 익숙하게 선택해왔던 나의 방식을 내려놓고,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단계가 선행되어져야 한다. 열려 있는 상태에서 내가 자동으로 택한 도구가 무엇인지 감지하고, 그것이 탁월한 도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때로는 내가 살아온 방식을 상당부분 부정해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신이 자동적으로 선택한 경험적 도구 역시 당신을 위한 목적으로 온 몸이 보인 반응의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당신의 몸은 당신에게 협조적이며, 그러한 당신을 위해 얼마든지 능동적으로 다른 방법을 쓸 준비가 되어있다. 설득하지 않아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준비가 되어있는 몸이다. 다만 그런 몸이 잘 작용할 수 있게, 당신의 마음을 잘 알아차리고, 감정과 방법을 적절히 선택하고, 다양한 감정과 방법들을 접하며 내가 나에게 챙겨줄 수 있는 것들을 야무지게 챙기는 것이 당신에게 스스로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인 것이다. 무턱대고 무리하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안해본 것, 안가본 곳을 다녀가며 감수성의 지평을 올리자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서서히, 내 마음이 이끄는, 습관적으로 이끌어지는 것이 아닌 상황에 살아 숨쉬며 반응하고 싶어하는 나를 느껴 보자는 것이다. 


늘 다니는 길과 안 가본 길. 늘 다니는 길이라 해서 더 좋은 길은 아니다. 


'운동한다는 것'은 새로운 움직임에 나를 열어두는 것이다. 


 마음대로 되는 세상과 상황은 그렇게 영화세트장처럼 우리 주변에 산재해있지 않다. 안해봤던 운동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에 나를 맡기고, 써보지 않았던 근육이 운동에 따라 발달되는 것을 느끼는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다. 그래서 새로운 운동을 즐겨 할 수 있는 사람은, 늘상 즐겨 썼던 익숙한 사고방식을 고수하는 것 같다가도 유연하게 몸과 삶의 움직임 방식을 바꾼다. 골프를 좋아한다고 해서 골프가 내 인생에 건강화 활력을 주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골프로 안가본 필드도 가보고, 안 쳐봤던 샷 자세도 취해보고, 그린 위에서 걸어보고, 뛰어보고 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모두 수련이고, 수행이다. 당신은 익숙한 방법이 당신을 이끌 때, 그대로 보고 있을까, 새로운 방법에 대해 시도해보고 고민해볼까?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혹은 다른 삶에 대해 얼만큼 호기심을 갖고 배우고 있는가? 세상은 당신에게 살만한 곳인가, 외롭고 척박한 곳인가? 당신은 당신과 다른 삶의 방법들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가?  


오늘도 익숙한 감정이 이유없이 올라와 나를 괴롭힌다면, 손목에 밴드를 묶고 '정신차려' 하는 동시에 마음에 난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에 들어서보자. 생각보다 충만한 삶의 장면이 당신 앞에 펼쳐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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