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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Oct 28. 2021

새는 알에서 깨어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혹시라도 한 번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람을 위해 소크라테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너 자신을 알라" 고.


 태어나서 현재까지, '나'는 나에게 수많은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연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를 "여태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로는 만족이 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나'를 시간순으로 분류해 들여다보자면, '과거의 나'가 있고, '현재의 나'가 있으며, '미래의 나'가 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나의 가장 가까이에서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생각들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나' 자신이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해 숱한 정보를 쌓았는데도 정작 묻고 싶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그러니까,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나는 잘 알고 있지만, 내가 굳이 나를 탐구하고 싶은 이유는 '나'가 가진 가능성, 그리고 여태까지 갈고닦아 온 역량, 경험, 자원들을 종합해 '더 나은 나'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바탕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라는 불확실의 폭풍 속에서 나는 파도를 얼마나 타 넘고, 미지의 세계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 끝내 안정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자아탐구의 시작은 결핍이다. 삶과 세상은 불확실하지만 미래 어디쯤 가보면 만날 '되고 싶은 나'는 구체적이거나 명확하지 않다. 막연히 멋진 미래의 누군가를 바란다. 만일 구체적인 미래의 나를 원한다면, 탐구라기보단 실행계획에 옮기면 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미지의 어딘가에 방점을 찍고, 방점으로 향해 가기 위한 (낙관적인) 계획을 세운다. 인간은 늘 성장하고, 경험 속에서 겪었던 숱한 일들보다 더 영향력이 큰, 성취가 높은, 보람과 의미가 큰 일에 자기 자신을 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이 긍정적인 사람은 할 수 있는 것들과 한계의 경계를 정확히 알지 못해 과감하게 도전한다. 물론 도전했다가 시행착오를 겪거나 좌절을 경험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다. 그러한 경험이 쌓이면 다시 '자아'를 탐색하는 데 자양분이 된다. 자아 탐색의 시작은 '좋은 나', '되고 싶은 나'를 향하기 때문에 탐색의 동기가 다소 감정적이다. 감정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는 자기를 과대평가하게 하거나, 과소평가하게 하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과대평가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도전을 할 수 있게 하는 긍정적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제대로 냉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몽상가가 되기 십상이다. 막연한 인재상에 방점을 찍고 자아탐구를 시작했다 할지라도 자아탐구를 위한 경험의 세계 속에서 '되고 싶은 나'가 될 수 있을 것인지 탐색을 시작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 설사 어린 시절에 속해 있던 '참되고 바른 길'에서 살짝 벗어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두운 세계를 경험해보고 있다 하더라도 삶은 대충 살면 안 된다. 한 번쯤은 대충 살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 자아탐색의 과제로 '대충 살기'를 선정했다 하더라도, '대충'이라는 태도를 선택한 나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삶의 경험을 쌓아야 진정한 의미의 자기 탐색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자기를 탐색해 나갈 때 자기만의 세계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탐색해 나가는 과정은 깨달음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만의 세계에 매몰되는 것과 고독력에 기반해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아탐색을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두 태도의 차이를 나는 '과거 탐색을 위해 과거 속의 나 다시 보기'와 '미래 준비를 위해 과거의 나를 다시 보기'로 구분하고 싶다. 전자는 과거의 영광, 과거의 후회와 슬픔을 되새기며 습관적으로 같은 감정에 매몰되는 것이다. 살아가며 쌓는 아픔의 경험들은 삶의 경험치가 깊어질수록 점점 복합적이며 해결에 관련된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아픔이 된다. 다시 말해, 과거 탐색을 위한 과거 속의 나를 만나러 갔고, 과거에 겪었던 어려움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게 됐고, 그때 어긋난 인연들을 부여잡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혹은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를 끝없이 반복 재생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 새 걸음을 내딛는 것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경험의 세계에서 얻은 정보들을 미지의 미래로 가져가 '되고 싶은 나'로서 살아가면서 새롭게 맞닥뜨릴 문제 해결에 점차 숙련도를 높이는 것. 진성 리더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2보 전진을 위한 1보 제자리걸음을 망설이지 않는다. 제자리걸음을 걷는 동안조차 자신의 사명과 링크가 될 정보들을 탐색하고 의미 부여하며 더 어려운 과제를 맡더라도 지금의 제자리걸음이 훗날 더 많은 사람들을 변화하게 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체질개선과 활동력 증가, 동료를 위해 기꺼이 동료의 아픔을 나눠질 수 있는 에너지의 케파가 늘어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믿고 시간을 쌓아 올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소설의 화자 '싱클레어'는 자기를 발견하고자 방황의 시간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은 어렵고, 치열한 일이었고 싱클레어는 치열하게 삶의 시간을 쌓는 과정에서 방황했다. 방황하던 중에 싱클레어가 알아차리게 된 것은, 자신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며, 부모님으로부터 보호받던 삶에서 벗어나 무엇이 진리이며 진실인가에 대해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한 번 싱클레어가 각성할 때마다 그의 세계는 깨어졌다. 부모님과의 삶 속에서 존재하던 바람직한 세계가 깨어졌고, 프란츠 크로머가 깨어졌으며, 크나우어가 깨어졌고, 피스토리우스가 깨어졌다. 그가 거쳐온 세계가 깨질 때마다 싱클레어 역시 격한 성장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한다. 사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찾고자 했던 자아의 한 부분이었다. 어쩌면 그가 거쳐온 세계가 모두 그가 자아 속에 담고자 한 모습의 일부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담았던 세계를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자아 속에 담으며 성장해간다. 거쳐온 세계와 주고받음을 통해 상호적으로 영향을 교환하는 것이다.


 자아 탐색을 위한 시간은 양적인 축적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스스로 미래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가 쌓이면 그때부터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자리를 '무엇을 할 것인가'의 질문이 대체해야만 한다. 질문의 순서가 바뀌면 '무엇'을 찾아 나서며 상당히 많은 '무엇'을 이뤄내는 성과를 세울 수는 있어도, 어느 순간, 그 '무엇들'이 향하는 방향이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목적 없는 실천은 어느 순간에 공허하다. 나의 존재 의미는 목표 달성이나 과업 수행이 아닌, 존재 그 자체에 있으므로, 존재의 의미를 찾고 나서 존재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하는, 혹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찾기 위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주체를 내면으로 파고들게 한다. 나는 어떤 강점과 약점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성향을 갖고 사는 사람인지, 어떤 때 어떤 압박 혹은 촉진을 받는지, 어떤 지향을 가진 사람인지를 탐색하며 끊임없이 내면과 대화하고 깊숙이 내면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질문이다. 내면 속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고 나면, 그러한 내성을 외성으로 전파하고 전달해 세상에 내 존재로서의 가치를 환원해야만 한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존재이며, 생존을 위해, 혹은 성장을 위해 타인과 협력과 갈등, 밀어줌과 끌어줌, 그 외 상호작용을 경험한다. 그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타인과 어떤 교류를 할 때 그 가치가 극대화되는지를 깨닫기도 한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은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이롭게 세상에 전하고 싶다는 욕구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개인은 자기중심의 세계관을 세상으로 확장시킨다. 그렇게 확장된 세계 관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개인의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조차 개인적인 이익과 자기본위의 생존을 위한 고민을 한다. 그러나 자신과 세계가 연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개인은 "무엇"의 범주를 세상으로 확장시킨다. 자신과 세계가 연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삶의 가치관을 완전히 바꿔놓을 커다란 사건이 계기가 되기도 한다.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신념이 바뀌는 경험이나,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경험, 자신과 다른 가치관으로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도움을 받거나 영향을 받았던 경험 등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가치관으로 만들어진 한 사람의 사명과 가치, 비전은 성장에 따라 숱하게 검증의 단계를 거친다. 셀프 검증과 세계관의 확장, 자기 조절력을 수반한 자기 계발활동, 타자와의 관계 경험, 신뢰의 실천, 시행착오 등의 단계를 거쳐 가며 개인의 질문은 심도가 깊어진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티베트에서의 7년"이라는 영화는 히말라야 등정을 목표로 했던 주인공 하인리히 하러는 는 의뢰받은 등정을 목표로 산에 오르다 조난당한다. 당시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었기에, 독일 연합국인 오스트리아 출신 하러는 본국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티베트에 숨어 7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지극히 개인적 욕망(그것도 기술적, 경제적 욕망)을 수행하며 살고 있었던 하러는 티베트에 살면서 티베트 국민들이 자연과 더불어 우월한 존재가 아닌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겸손을 배운다. 효율보다는 공존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기도 한다. 산에 오르기 전 임신 중이었던 아내가 낳았을 아들을 깊이 그리워하던 하러는 서양 문물에 호기심이 있던 13세 달라이 라마와 대화를 나누며 그를 아들과 비슷하게 생각하며 각별하게 대하게 된다. 중국의 티베트 탄압이 시작되자 하러는 달라이 라마에게 구출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는

 "난 남을 거예요. 그게 국민을 위한 일이고. 나도 안 가겠어요. 구원은 자신밖에 있으니 부단히 정진하고 노력해 자신 밖의 구원을 찾도록 애쓰라고 했지요. 난 당신의 아들이 아니에요. 나 역시 아버지라 생각한 적이 없고. 그러니 하러, 당신은 떠나세요."


라 말하며, 중국의 티베트 탄압은 고통이 아니며, 티베트 탄압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의 마음이 고통인 것이라고,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닌, 자신 밖을 지키는 것이라 말한다. 그야말로 달라이 라마라는 존재로서 스스로 존재 의미를 찾은 사람으로서의 지혜다. 달라이 라마는 어리고, 대사는 그리 길지 않지만 자신을 진정으로 지키는 리더로서의 자세가 자기의 일신을 지키려는 시야에서 벗어나 더 넓고 큰, 소속된 공동체의 구성원과 나아가 인류 평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확장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하러 와 달라이 라마는 다투거나 갈등하지 않으며 서로를 존중하고 깊이 마음을 나눈다.


 티베트에서의 7년의 주인공인 하러, 피스토리우스를 벗어난 데미안이 내성으로의 자아탐색을 넘어 세계관의 확장과 외성으로의 자아탐색으로 그 방향을 바꿨다. 이는 숱한 삶의 경험을 거쳐가며 자기 자신을 넘어선 주변 세계 역시 리더로서 품을 수 있다는 일종의 자기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다. 리더로서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있으려면 밑도 끝도 없는 무한 긍정주의보다는 어떠한 상황에서 스스로 이렇게 해결했고, 유사한 문제가 다시 발생하더라도 나름의 방법으로 이겨냈던 객관적이면서도 냉철한 경험 분석이 필요하다. 자기 조절, 객관적 정보분석, 관계적 투명성 등 강한 사람이어야 동요하지 않을 수 있고 결정할 수 있으며 책임질 수도 있다. 또 강한 사람이어야 타자의 의견도 수용이 가능하다. 에리히 프롬이 강조한 소유하는 사랑, 존재론적 사랑 중 가장 평화적이면서도 타자를 향한 사랑을 담아 마음을 전하는 방범은 치열하게 자기를 탐색하는 끈기에서 온다. 자신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타자와의 연결성을 발견하고, 공동체로 세계관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은 그래서 치열하지만 따뜻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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