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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Nov 10. 2021

함께, 이동하시죠.

엉성한 비전을  갈고 다듬어 '신뢰'를 빚어내는 리더십 형성의 과정

 달리기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소위 달리는 사람들끼리 칭하는 호칭으로 달리기의 종류를 구분하기도 한다. 조깅, 러닝, 마라톤 등 일반적으로 달리기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이 듣기에는 비슷비슷한 것 같은데, 달리는 사람들끼리는 개념을 달리 받아들이는 언어적 감수성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조깅은 '취미 달리기'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건강한 몸만들기를 목적으로 컨디션과 페이스에 맞게 꾸준히 달리는 운동으로 메인 운동 전 워밍업, 쿨다운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가볍고 여유 있게 달리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며 달릴 수도 있다. 그저 '달리는 것' 이 좋아서, 좋아하는 길을 걷기보다 40%~60% 정도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이 조깅이다.

 러닝은 마라톤 등의 경기 출전을 목적으로 훈련하는 성격을 띠는 달리기다. 속도를 높이는 스피드 트레이닝, 긴 거리를 천천히 꾸준히 달리는 LSD(Long Slow Distance) 트레이닝, 주력과 근력을 높이는 업힐(Up hill) 트레이닝, 인터벌 트레이닝 등 전반적 달리기 기능을 향상하는 달리기로, 유산소성 운동 효과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달리기를 위한 순발력, 지구력, 기록 향상 등 다소 강한 강도로 달린다. 이른바 '진지한 달리기'라고 할까.


 마라톤은 42.195km를 달리는 달리기 경기로, 마라톤 훈련을 한다고 하면 소위 30km 이상의 장거리 달리기 훈련을 일컫는다. 초보자가 한 번에 풀코스를 완주하는 것은 몸에 많은 무리가 있을 수 있으므로 러닝 훈련을 통해 기능을 향상하고, 차츰 거리와 시간을 늘려가며 훈련을 한다. LSD 훈련으로 지구력을 향상한 후 점차 장거리 기록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장거리를 꾸준히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경험이 중요하다. 장거리 달리기를 준비하는 것은 상당기간 시간과 노력, 하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요즘은 취미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다. 다양한 스포츠 브랜드가 러닝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고, 젊은 층에서도 취미로 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날씨가 춥건 덥건 한강변이나 근린공원에는 달리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다. 나도 달리기를 취미로 시작한 지 벌써 햇수로 4년가량이 넘어간다(물론, 내가 하는 달리기는 조깅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답답해서 무작정 걸으러 나갔다가, 문득 조금 더 속도를 내어 달리면 답답함이 가실까 싶어 시작한 달리기였다. 몇 개의 스포츠 브랜드 행사에서 주최하는 달리기 대회에 나가보고서, 참가비를 내면 받을 수 있는 티셔츠며 기념품들을 모으는 재미가 있었다. '런데이'라는 어플을 통해 프로그래밍된 달리기 훈련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나갔고, 8주짜리 프로그램을 두 번 완수하고 나니 10킬로 정도는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프 코스를 완주하며 오래 달리기에 제법 자신이 붙었다. 그리고, 달리기를 하며 꾸는 꿈이 생겼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나가서 달릴 수 있다. 그러나 혼자 달리는 것보다는 함께 달리고 싶었다. 혼자서 달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같이 달리자고 하고 싶었다. 나도 달리기 초보자지만, 체력적으로, 경험적으로 초보자인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제안할 수 있는 운동이 달리기라서 <운동습관 만들기> 모임을 운영할 때에 습관 초보들에게 제안하는 운동은 걷기와 달리기다. 처음에는 걸으며 걸음 수를 채우는 연습을 하다 자기도 모르게 조금 달려보는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 오는 분들에게는 '런데이' 어플을 추천한다. 그렇게 한 분 한분 달리기의 세계로 안내하다 보니 달리기의 매력을 보다 널리, 함께 달리기를 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해보고 싶어졌다. 시각장애인 가이드 러닝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서, 관련 활동을 하고 있는 지인을 찾았다. 그에게 나도 언젠가는 시각장애인 가이드 러닝을 해보고 싶다고 전하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면 되냐고 물었다.


 "단순히 이벤트로 한번,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하고 참여할 거라면 하지 마세요."


진심으로 전한 말이었는데 그의 반응은 생각보다 단호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시각 장애인 분들 중 달리기를 오랫동안 해 오셨던 분들이 제법 많고, 일반인 러너보다 더 노련하게 잘 달리시는 분들도 제법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달리기 위해 일반인보다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할 테니, 달리기에 쏟는 정성도 더욱 각별할 것이다. 매번 달리는 코스를 그대로 달린다면 그나마도 조금 나을 텐데, 달리기 대회의 코스는 매번 조금씩 바뀐다. 조깅이 아닌 러닝이므로, 달리기의 강도도, 훈련 프로그램도 제법 난이도가 있다. 달리기 실력도 따라 줘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했다. 그들이 안전하고 즐겁게 달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가이드러너는 단순한 한 번의 이벤트로 참여하는 것이 아닌, 훈련의 시작부터 훈련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대한 걱정까지 공감하는 파트너십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이드러너에 도전하는 많은 이들이 달리기 코스만 가이드한다고 생각하지,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한다며 그는 안타까워했다. 당장 최근에도 진행됐던 가이드 러닝 클럽의 발대식에서 파트너십에 대한 설명은 생략된 채,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뒤 가이드러너 자원자들이 시각장애인들의 귀갓길을 생각지 못한 채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고 한다. 덩그러니 남아 어떻게 집에 가야 하는지 당황하셨던 20여 분의 시각장애인 러너분들께 송구스러웠다는 그의 말.


 분명 가이드러너 자원자들은 자신과 구성원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진정성 있는 사명을 가지고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들의 비전은 시각장애인과 즐겁게 달리고, 함께 밀어주고 끌어주며 달렸던 경험으로 의미 있는 경험을 해내고 싶다는 사명에 이르는 길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달리기' 자체만 놓고 좁은 시야로 가이드러너의 사명과 비전을 실천에 옮기는 정신 모델만으로는 그들의 리더십에 심각한 구멍이 뚫려버린다. 가이드 러닝 전후에 일어날 수 있는 맥락적인 흐름을 파악해 진정 시각장애인 러너들이 편안하고 즐겁게 러닝 할 수 있는 가이드를 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는 범주에서부터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예상할 수 있는 범주의 일까지 생각하고 물어보며 사명과 비전에 이르는 길을 구체화하고, 더욱 견고한 실행력과 탄탄한 파트너십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훈련 장소에 집결하기 이전에 파트너로 배정된 시각장애인과 긴밀한 소통을 통해 어떤 교통수단으로 오는지, 교통수단 이후 도보 이동은 어떻게 하는지,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은지 확인하는 일, 훈련 후 식사와 귀가는 어떻게 하는지, 그들이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만나는 불편함에 공감하고, 미숙하지만 점차 경험을 쌓아가며 시각장애인 러너와 합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리더십과 팔로워십을 구축하려면 가이드러너는 그의 역할에 항상 '임재' 해 있어야 한다.


 시각장애인 러닝 훈련을 준비하며 자신의 파트너에게 전화를 거는 지인의 모습에서, 든든한 파트너십을 봤다. 파트너십은 각오와 다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아는 것에서 나온다.


 "네, 선생님. 어느 역으로 오시나요? 제가 00역 0-0번 승강장 쪽으로 가서 연락드릴 테니 '함께' 이동하시죠."


 처음부터 온전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리더는 없다. 그러나 엉성하더라도 방향을 정해 놓고, 방향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경험을 쌓아가며, 자신의 역할과 본질에 비추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의 전후를 고민해 '임재' 할 수 있는 시야. 자신의 역할에 머무르며 처음의 방향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보다 바람직한 방법에 대해 수정하고 개선하며 팔로워와 합을 맞춰나가는 리더십. 단순히 '좋은 일'을 하는 취지 이상으로 '탁월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은 여기에서 온다. 어쩌면 내 지인의 문제제기 덕에 많은 가이드러너 자원자들은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마자 뿔뿔이 흩어져 귀가해버린 자신의 실수에 직면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시간을 보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지적은 그들의 진정성 어린 스토리를 완성하는 진북의 거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이 놓친 것들을 수정할 때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실수보다는 거시적인 방향을 놓치지 않고 결국은 시작했을 때의 비전에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개선해야 한다. 리더십은 예술 작품을 만들듯, 혼자서 갈고닦아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이드러너 자원자들로서는 함께 하는 시각장애인 러너의 의견과 운영진의 의견, 다른 가이드러너들의 경험담, 조언 등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진정성을 빚어내야 할 것이다. 주변의 의견들과 뼈아픈 직면, 자신의 진심과 보다 나은 방법을 향한 고민과 탐구의 시간을 거쳐 한 땀 한 땀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 결국 가이드러너 자원자의 가이드에서 진심으로 드러난다. 이 진심은 결국 활동을 거듭하며 함께하는 구성원들과 쌓는 '신뢰'가 될 것이다. 시각장애인 가이드 러닝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달리기 코스를 안내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통해 안갯속에 숨었던 리더십을 진성의 다이아몬드로 빚어내는 리더십의 형성 과정과 닮아 있다.


 진심만으로 모든 과정이 이해되고 탁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진심이 투명하고 견고할수록, 진심을 드러내는 방법을 고민하는 자의 전문성, 탐구의 깊이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진심과 진정성은 옳은 방향으로  발자국을 내딛는  발의 동력이지만, 방향도, 과정도 끊임없는 검증과 검열, 직면과 개선의 과정이 동반되어야만 진심이 향했던 목적지에 다다를  있다. 러닝 코스에는 수많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 동반자에게는 앞이 보이지 않고, 나는 그와 함께 의미 있는 달리기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사명이 있다. 그저 진심만으로 그에게 밝은 시야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함께라는 경험이 안전하고 즐거울 수 있도록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끊임없이 챙기고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 소통하는 것 뿐.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환하게 보이는 길로 드러내는 과정은 때로는 함께 열린 소통을, 때로는 혼자 치열한 고민과 탐구를 해야 하는 과정일 것이다. 진성 리더십의 과정은 비단 가이드 러닝에서 뿐 아니라 세상을 사는 이가 타자와 더불어 인격적 성장을 거듭하는 험난한 삶의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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