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십 년 전의 이야기이다. 군대를 입대하려고 306 보충대를 갔다. 전날 머리를 짧게 민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마음을 많이 아파하셨다. 의정부 306 보충대까지 갔다. 다른 입대자들은 배웅을 하러 여자 친구들을 데려왔다. 저들은 어떻게 저렇게 능력자들인가라고 생각하고 부러워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에만 다녔으니 여자 친구 사귈 기회가 없었다. 여자들이 먼저 다 나를 싫어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관심도 크게 갖지 않고 살았다. 여하튼 군대 입소하는 날 여자 친구들이 와서 배웅해 주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과연 그 여성분들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는 않았는지 모르지만 부러웠다.
306 보충대의 연병장에서 정렬을 한 후에 군 입대 의례를 거치고 있었다. 멀쩡한 사람도 일반 사복에 머리를 깎아놓으면 볼품이 없어 보인다. 유명한 연예인이 입소하는 장면을 봐도 과연 저 사람이 연예인이었던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모든 의례가 마친 후 가족들과 이별을 하고 군대 막사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저 멀리 같이 온 가족들이 어딨는지 찾아보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찾지 못했다. 군대 막사로 전부다 뛰어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친절하고 순한 양 같던 조교들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발사되기 시작한다. 살다가 이런 욕은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다. 그 욕을 듣고 사회와 멀어져서 군대에 들어와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3일 동안 신체검사 받고 뛰고 걷고 한다. 입었던 사복을 박스에 담아서 가족들에게 보낸다. 보통 부모님들이 이 옷을 보고 가장 많이 우신다고 한다. 나중에 어머님도 많이 우셨다고 들었다. 안에 있는 사람의 설움은 밥 먹을 때 몰려온다. 하도 긁어대서 하얗게 부푸러기가 일어난 주황색 식판의 밥을 받을 때 설움이 폭발한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인가 할 정도로 맛이 없다. 된장국을 어떻게 끓이면 이런 맛이 들지 의문이 들 정도다. 주걱 대신 삽으로 밥을 푸고 드럼통 같은 크기에 국을 끓이니 맛이고 뭐고 없다. 그냥 일정량만 생산해 내면 되는 듯했다. 밥을 먹고 있는데 조교 놈들은 1분 내에 먹으라고 또 지랄을 해댄다. 밥을 밀어 넣어도 다들 왕성한 시절이니 잘도 소화시켜 낸다.
명찰도 그냥 천천히 달면 되지 꼭 5분 내로 달라고 한다. 바느질 처음 해보는 녀석들은 난리가 아니다. 조교는 또 와서 빨리 달라고 야단이다. 마음이 급하니 더 바느질이 되지 않는다. 빨간색 죄수번호 같은 명찰을 바느질로 달은 것 자체가 신기하긴 하다. 처음 해보는 데도 어쨌거나 다 달고야 만다. 교도소의 재소자이거나 군인이거나 둘중에 하나다. 마치 6.25 피난민 시대로 세월을 거꾸로 흘러간 느낌이다. 거기서 3일을 대기하다가 각 사단별로 배치를 받아 버스나 트럭을 타고 이동을 한다.
버스가 갈수록 깊은 산골짜기가 나오면 그 군 생활은 개고생이다. 뻔히 그 고생길이 보인다. 나는 선배 형들이 특전사, 수도방위 사령부 등의 군기가 센 곳들을 많이 나와서 가장 센 곳에 가기를 희망했다. 백골부대라든지 최전방으로 가기를 원했었다. 이것은 진심이다. 군기가 센 곳에서 복무하는 것이 우상처럼 느껴졌기에 개고생을 하더라도 최전방이나 특수부대로 가고 싶었다. 군대를 빡 쎄게 나오는 것이 나의 명예처럼 느껴지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버스가 가면 갈수록 시내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 참 이상하네. 산골짜기의 보충대로 입소를 했는데 갈수록 도시가 보인 곳으로 가다니 좀 신기했다. 도착 전까지는 비밀리에 부치기에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도착해 보니 신도시 외곽에 있는 사단으로 배치가 되었다. 그곳에서 7주간의 훈련을 했다.
여러 훈련들을 했지만 나는 가장 두려웠던 것이 화생방 훈련이었다. 그때만 해도 민주화를 위한 데모를 많이 해서 최루탄을 많이 마셨다. 세게 마시지 않았는데도 온 구멍에서 눈물이 나온다. 하여튼 화생방 훈련이 가장 공포스러운 훈련이었다. 큰 아이가 해병대를 지원해서 7주간의 훈련을 받을 때도 가장 걱정했던 훈련이 화생방 훈련이었다. 아들이 그곳에 들어가면 나도 같이 그 가스의 고통을 느끼는 듯했다.
화생방 훈련 당일이다.
6평 남짓한 가건물 앞의 운동장에서 구르고 또 굴렀다. 화생방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군기를 잡으려고 참 많이도 굴러댄다. 지구도 둥근데 우리들도 데굴데굴 구른다. '좌로 취침' , '우로 취침', '뒤로 취침' , '앞으로 취침' 연병장에서 참 취침도 많이 했다. 수차례 취침을 반복하다보면 뇌와 몸이 따로 놀기 시작한다. 그냥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 내무반의 침상 대신 연병장에서 취침을 많이 한 것 같다. 화생방의 공포가 있기에 훈련이 받아도 고통을 잘 못 느낀다. 앞의 더 큰 고통이 예상되면 지금 겪는 고통은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훈련받는 그룹 중에 거의 마지막 그룹이었다. 즉, 앞에 아이들이 다 울면서 나오는 것을 다 지켜본 것이다. 고등학교 때 학생 주임 선생님이 30명의 아이들을 팰 때 처음에 아이가 가장 아플 것 같다. 아니다. 맨 마지막 사람이다. 선생님의 힘은 계속 빠져 가지만 맨 마지막의 사람은 이미 정신적으로 사망 상태다. 학생 주임 선생님은 의아해한다. 나는 힘이 계속 빠져서 살살 때리는데 아이들은 왜 더 큰 비명을 지르는지 의아해한다. 맨 처음 받은 학생은 마음의 평안을 얻으며 다른 친구들의 고통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멍하니 바라본다. 이미 매를 먼저 맞았기에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반변에 맞는 것을 대기하는 학생들은 맞기도 전에 이미 정신적으로 사망 상태다.
화생방 훈련을 마치고 나온 같은 기수의 병사들은 구멍이라는 모든 곳에서 액체가 흘러나온다. 꿱꿱 거리는 소리는 왜 그렇게 큰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러 대는 것인가. 뒤에서 기다리는 나는 공포스럽다. 드디어 가스실에 들어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에 안개같은 가스로 가득차 있다. 역시나 방독면을 쓴 조교들이 또 욕을 해대고 몽둥이를 들고 있다. 두 명의 조교가 있었다. 한 명은 나가지 못 하도록 출입구를 봉쇄한다. 또 한 명은 가만히 서있기도 힘든데 쪼그려 뛰기를 시킨다. 군가도 부르라고 한다.
그러다 갑자기 '정화통 분리' '방독면 벗어'라고 외친다. 이것은 무슨 개소리인가. 그냥도 죽겠는데 방독면 벗으라니 말이 되느냐 말이다. 내 방독면은 정화통이 고장이 났는지 쓰나 안 쓰나 똑같은 것 같다. 방독면을 벗은 우리들은 고통에 신음하기 시작한다. 나가려고 문으로 뛰어가려고 하지만 문은 철문처럼 굳게 닫혀있다. 고통스러워서 벽을 긁어대는 아이들도 있다. 그 안에서 몇 분이 안 되지만 나는 1년처럼 느껴졌다. 이 녀석들 왜 이렇게 이곳에 오래 잡아놓는 거야. 드디어 문이 열렸다. 우리는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아마 이 속력이면 100m 올림픽 신기록도 올릴 수가 있을 것 같다.
수통에 물로 얼굴을 씻어댔다. 남자는 고개 숙이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내 원칙을 지켰다. 눈을 하늘로 향한 채 수통의 물을 얼굴에 부었다. 눈물과 물이 섞여 눈 뒤로 흘러 머리 뒤로 흘렀다. 남자의 눈물은 머리를 들고 흘려야 한다. 얼굴을 향해서 하늘을 보고 울어야 한다는 내 조그마한 원칙은 지켰다. 남자는 함부로 고개 숙이지 않는다.
아무리 수통의 물을 부어대도 따가움이 가시지를 않는다. 고통이 사라지니 이곳이 바로 천국인 것처럼 느껴진다. 화생방 가스실에서 들려오는 이들의 고통 소리도 공포가 아닌 배경음악처럼 편안하게 들려온다.
이렇게 6주간의 훈련을 거치며 어리숙한 모습의 청년들이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하고 멋있어진다.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게 개조가 될 수 있는가를 체험하게 된다. 훈련을 마친 후 수료식에 달라진 점은 눈빛이다. 눈빛에 살기가 느껴진다. 살면서 그런 눈빛은 다시 한번 가져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긴 시간 군대 이야기를 적어보았다. 그중에 화생방 훈련 이야기를 적어보았다. 인생을 살다보면 화생방의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실제로 겪어보면 할만하고 별것 아닌데 말이다. 그 과정이 두려워서 아예 시도조차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많다. 인생에는 화생방 같은 가스실을 반드시 만난다. 저곳을 통과해야만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다. 두렵고 용기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다. 통과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결단을 해야 한다. 그냥 통과하면 별것 아니다.
공포와 고통 가운데 있다면 빨리 결정을 해서 그 과정을 마무리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 군대 훈련소 퇴소 후에 그 생기 있는 눈빛을 지금 잠시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