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산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고민을 하다가 가기 전날 바로 늦은 결정을 했다. 금요일 밤 10시에 무박 산행이다 보니 금요일 마음이 바빠진다. 양재역에 10시 전에 무사히 도착했다. 반가운 얼굴들을 버스에서 만나고 바로 여수로 출발을 한다. 여수하면 무척 멀게 느껴지는 곳인데 버스로 가고 오고 하니 먼 거리의 부담감이 적어진다. 특히, 올라올때는 전용차로를 이용하니 빨리 서울에도 올 수 있다. 드디어 19명이 인원을 태우고 여수로 버스가 향한다.
코로나 거리 두기가 어느 정도 완화가 되어 예전보다는 마음이 좀 편한 상태로 산행을 떠난다. 지인들의 SNS에는 남쪽이 온통 벚꽃과 산수유 꽃들이 만개를 했던데 여수는 어떤 꽃이 반길지 설렌다.
1. 버스도 달리고 우리도 달린다.
버스도 달리고 각자의 자리에 앉은 채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도 달린다. 그냥 수다 떠는 것이 즐겁고 소식이 궁금하고 만남 자체가 반가운 것이다. 버스도 달리고 우리도 달리니 여수에 얼마나 빨리 갔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OO이 형님께서 협찬하신 윤기가 흐르는 족발이 대화에 기름칠을 한다. 그런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를 않는다. 그때는 무척 재미있었고 힐링이 되었는데 글로 적으려 생각해 봐도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눈빛만을 마주쳐도 다 즐거운 자리였다.
오랜만에 17가 동기가 세명이 모였다. 각자의 마음은 항상 20대로 착각을 하고 사는데 서로의 휑한 머리숱과 흰머리를 보고 나이 들어가고 있음을 서로 깨닫는다. 50대 초반인데 그 버스에서는 막내다. OO가 밑의 후배들을 꼬셨는데 쉽게 되지 않는 모양이다. 후배들은 아이들이 한참 손이 필요한 나이이고 각자의 사정이 있을 것이니 이해는 한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여수 가는 버스에 동행하고 있음을 믿고 있다.
2. 항일암의 일출과 동백나무
우리의 단골 기사이신 'O자일' 기사님이 새벽을 달려서 여수에 4시경에 도착했다. 무척 빨리 도착했다. 기사님의 이름을 생각하면 'O자일' , '자일의 정' , '자일'의 용어가 떠오른다. 이 분이 산악회에 들어오셨으면 꽤 이름값을 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피곤한 기색의 키 작은 'O자일' 기사님의 45인승 버스가 항일암 주차장에 도착했다. 라면과 커피를 마신 후 항일암으로 일출을 보러 간다.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어서 앞은 보이지 않지만 올라가는 길이 잘 되어 있어서 무사히 항일암까지 올라갔다. 해가 뜨기 직전이다. 항일암 주위를 돌아보니 나무들이 참 많다. 오래 산 동백나무들도 많다. 동백꽃이 매혹적이다. 어느 여인의 매혹적인 빨간 입술이 생각난다. 물론 내 주위에는 그런 입술을 가진 분은 없다. 그냥 상상을 해본다.
항일암은 여수 바다를 바라보며 햇볕이 잘 드는 곳이다. 바위의 산에 암자가 있는데도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바위틈에서 잘 자란다. 잘 자란 나무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위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에 세월의 깊은 품격이 느껴진다. 나이들 수록 저렇게 품격이 있어야 하는데 생각을 해본다.
바위틈이지만 햇볕이 잘 들기에 나무들이 왕성하게 잘 자란다. 나무는 햇볕만 잘 들면 어떻게든 잘 자란다. 그곳에 암자와 바위만 있었다면 새해 일출의 명소로 각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무가 함께 했기에 그곳이 더욱 명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매혹적인 빨간 동백꽃이 사람의 마음을 잠시나마 옛사랑을 추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은 현재의 애인과 일출을 보러 왔지만 그 동백꽃을 바라보며 옛 애인도 잠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다른 애인도 가끔 생각하는 것 그것이 삶의 여백이고 잔잔한 기쁨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동백꽃은 옛 애인을 생각하게 만든다.
해가 좀처럼 뜨지 않는다. 밑에 붉은 기운이 깔리고 구름이 있는 것을 보니 오늘 일출 보는 것은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출이 아니라 서해안의 일몰을 보는 듯하다. 그래도 희망은 있기에 계속 기다려 본다. 잠시 후에 해가 떠오른다. 남는 것은 사진뿐.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한다. 밴드에 올라온 것을 보니 얼굴이 대부분 검은색이다. 항일암에서는 일출과 동백꽃, 바위 속에서 깊게 뿌리내린 나무들이 인상에 깊게 남는다. 내려오다 보니 갓김치 가게들이 많다.
3. 동백꽃이 가로수다.
서울에서 4시간을 달렸을 뿐인데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꽃들은 피어있고 동백꽃이 가로수다. 서울 도심 속에 있는 플라타너스를 찾아볼 수는 없다. 약간은 이국적인 분위기가 든다. 서울 도심에 매몰이 되어 이런 자연을 자주 보지 못하는데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보게 된다. 산행을 위해서 진달래가 만발한 영취산으로 버스는 달리기 시작한다.
4. 영취산의 진달래
여수산업단지 앞에 있는 영취산을 보니 이미 진달래꽃이 만발해 있다. 산 정상까지 꽃이 만발해 있다. 역시 남는 것은 사진뿐. 진달래꽃을 배경으로 다 모델이 되어 본다. 진달래가 주인공인지 내가 주인공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서라면 서고 찍는다 하면 찍힌다. 카톡 프로필로 건질 것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찍어주고 모델이 되어 준다. 이렇게 진달래만 가득 핀 산은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군대에 있을 때 사단 본부의 환경 정화사업을 한 적이 있었다. 앞산에 있는 진달래는 다 캐다가 부대 내에 심었다. 산에 만개했던 진달래들이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군인들에 의해 순식간에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앞산에 진달래 대신에 주황색의 체육복을 입고 야삽을 든 군인들로 가득 차 있다. 나무 살 예산은 없으니 그냥 산에서 캐다가 6.25 전쟁 때 지어진 것 같은 부대 내에 옮겨다 심었다. 앞산에 있으면 더 아름다웠을 진달래를 칙칙한 부대 내로 이사를 시키니 어울리지도 않고 잘 뿌리내리지도 못했다. 진달래 하면 그 진달래에게 못씁질을 했던 생각이 난다.
영취산의 진달래는 다행히도 자기의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고 있었다. 역시 무엇이든지 자기의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다움이 있다.
5. 인간과 자연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모습
산행 중에 오른쪽을 보면 여수 공단의 모습이 있고 왼쪽을 보면 아름다운 산들이 있다. 공단에서는 햐얀 수증기 같은 것들을 계속 뿜어내어 분명히 미관상에는 좋지 않다. 그 매연들 때문에 영취산의 진달래들도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과 자연이 완벽히 조화를 이룬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여수 공단은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서 무척 노력을 할 것이다. 환경단체의 끝없는 감시속에서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바로 바닷가 앞이다 보니 배출되는 오염수들도 관리를 잘 할 것이다. 공단이 있어야 그곳의 일자리도 생기고 부유하게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여수가 발전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이유는 그래도 경제적으로 부유함이 한 몫한다고 생각한다. 산도 나름대로 잘 가꿔져 있었고 보호하려는 노력도 볼 수가 있었다. 그곳에 공단이 없었다면 좋겠지만 어차피 인간과 자연은 조화를 이뤄 살아야 하기에 지금처럼 서로 합의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6. 멍게가 살아 숨 쉰다.
여수에 계신 OO이 형님께서 멍게, 해삼, 갑오징어를 가져오셨다. 너무 맛있다 보니 먹는 품격을 잊어버렸다. 맛 앞에서 이성을 상실해 버렸다. 이런 좋은 해산물은 서울에 올라올 수가 없다. 좋고 싱싱한 것은 이미 여수에서 다 팔린다. 여수에 오니 이런 싱싱한 해산물을 먹을 수 있다. 여수 바다를 먹어 버렸다. 여수 바다의 짠 내를 그대로 삼켜 버렸다.
7. '여수 밤바다'를 마신다.
승민이 형께서 주신 것으로 배를 채우다 보니 점심은 좀 덜먹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예약해 놓은 식당에 가니 여수의 바다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해산물로 한상이 차려졌다. 그리고 형들은 '여수 밤바다'를 마셨다. 여수 바다를 그대로 흡입하는 느낌이라고 한다. 내가 나올 때 대기표가 89번인 것을 보면 여수의 맛집이긴 한가 보다. 그런데 '여수 밤바다' 를 먹는 것은 우리 일행 테이블만 있는 듯하다. 일행은 음료를 마신 것이 아니고 '여수 밤바다'를 마셨다.
8. 산행에는 말꾼이 필요하다.
여보지 나 김 OO 할 수 있는 말꾼이 필요하다. 우리 산악회에는 두 분이 계시다고 생각한다. 한 분은 6대 김OO 형님이시고 한 분은 10대 조OO 형님이다. 두 분이 버스에 같은 자리에 앉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무척 궁금하다. OO이 형님은 물에 빠져도 입술은 떠 있어서 계속 말을 하고 계실 것 같은 상상을 해본다. 그분이 등장하기를 내심 고대해 본다.
9. 양재역에서 헤어짐의 아쉬움
다음 산행을 약속하고 헤어진다. 잘 먹고 꽃구경하고 좋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그것이 행복 아니겠는가. 19명은 동백꽃의 붉은색을 모두 마음속에 간직한 채 다음 만남을 기대해 본다.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은 자연과 함께하는 것이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거기다가 제철 음식을 먹고 건강까지 얻는다면 제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10. 갓김치의 쓴맛이 코 끝을 찌른다.
선물로 받은 갓김치를 먹어본다. 갓김치가 쓴맛이 코 끝을 찌른다. 싱싱해서인지 참 맛있다. 서울에서도 여수의 바다 향기를 맡으며 자란 갓김치의 쓴맛을 느낀다.
서울도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춘천도 다음 주면 필 것 같다. 올해는 꽃길만 걸으려나 꽃을 많이 보게 된다. 어찌 꽃길만 있으랴. 그래도 꽃길 걸었던 추억 생각하며 지금 힘든 삶의 길도 기쁨으로 춤추며 걸어가 보려 마음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