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치다의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깊이 스며들어 멀리까지 미치다'입니다. 사무침은 사랑, 만남, 헤어짐, 다시 사랑을 통해 일어나는 마음의 소용돌이이며 이별이 임박할 때 휘몰아쳐 오는 간절함이다. 마음속 깊이 사무치다. 가슴에 사무치다. 그리움이 골수에 사무치다. 한이 골수에 사무치다. 사랑하는 마음이 사무치다. 등의 단어로 사용이 됩니다.
마음은 행복과 슬픔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스펀지입니다. 마음은 행복으로 말라있는 스펀지이기보단 슬픔으로 늘 젖어있는 무거운 스펀지일 때가 많습니다. 이런 대부분 마음 상태인 슬픔을 받아들여야지 항상 행복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 정답은 아닙니다. 슬픔은 안은 채 간헐적인 행복을 느끼며 조금씩 전진해나가는 것이 일상입니다.
항상 행복해야만 하는 것은 정답은 아니며 슬픔도 같이 받아들이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어둠과 빛이 동시에 존재하듯이, 사랑도 있지만 이별이 있듯이 행복과 슬픔은 마음속에 공생합니다. 슬픔을 안은 채 행복을 갈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일상입니다.
상실을 겪은 후 아이들은 갈망의 모험을 떠납니다. 교회 교사로 섬길 때 초등학교 예쁜 여학생이 지나칠 정도로 교사에게 집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지나칠 정도로 사랑받고 싶어 했고 교사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보통 아이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엄마는 떠나고 할머니와 남동생과 살고 있었습니다. 엄마와 상실을 겪은 후 그 아이는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지나친 사랑 갈망은 교사들에게 부담감을 주었습니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면 사랑에 집착을 하게 되고 사랑 구걸을 하게 됩니다. 어릴 적 사랑이 결핍이 되면 연인과도 동등한 관계에서 사랑을 나누지 못합니다. 마치 연인이나 배우자를 마치 어머니에게 사랑을 갈구하듯 하다 보니 상대방이 부담을 느낍니다. 상대방은 동등한 사랑을 나누며 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도 사랑 받고 싶은데 사랑을 달라고만 하니 사랑 거래에 문제가 생깁니다. 동등한 사랑을 나누지 못하니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 되어 버리고 어른인데도 아이 같은 사랑을 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 관계에서도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도 건전한 거래가 필요합니다.
긍정이라는 단어가 주류를 이루고 긍정의 힘이라는 책도 수없이 팔려나갔습니다. 긍정에는 힘이 있다고 하면서 슬픔을 겪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의 화두는 행복입니다. 긍정과 행복이 최우선 가치로 살아 SNS 사진에는 온통 행복한 모습의 사진들만 가득합니다. 옷은 노숙자같이 입은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SNS에서 누추하거나 슬프면 바로 친구 관계가 삭제가 됩니다. 행복한 타인 모습은 현실의 나를 쪼그라들게 만들고 타인의 기븜에 온전히 함계 해주기 힘듭니다. 웃고 있고 좋은 호텔이고 좋은 카페입니다. '어쩌라고'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SNS 공간은 '실제의 내'가 아닌 '되고 싶은 나'를 전시하는 공간입니다. 멀리서 너무 아름다운 푸른 풀밭이 있어 한달음에 가보았는데 거기에는 잡풀만 무성하고 소 배설물만 가득했습니다.
SNS에 아무리 행복하다 하더라도 삶은 행복과 슬픔이 공존합니다. 슬플 때는 굳이 행복해하려 하지 말고 슬픈 감정 스펀지에 그냥 슬픈 마음을 담겨 두는 것입니다. 슬픈데 행복해지려 마음 전환하려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슬픔이 있다면 슬픔은 간직한 채 일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복과 슬픔이 자석의 N 극과 S 극 만나는 것처럼 붙어서 같이 공생합니다. 행복과 슬픔은 항상 동행해서 행복할 때도 슬픔은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내면 근본까지 억지로 행복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행복의 가면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한 얼굴도 있지만 수심이 가득 찬 얼굴도 같이 갖고 가는 것입니다. 항상 웃는 얼굴로 행복만 하다면 그것은 머리에 꽃 꽂고 웃고 다니는 미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슬플 때는 슬픔도 가슴속에 갖고 그냥 일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복의 횡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강제적 쾌활함에 길들여져 가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에는 행복한 사진을 게시한 후 최악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굴에는 항상 미소를 띠어야 하고 직장에서도 절대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고 화장실에 가서 울라는 긍정의 횡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서비스업에 근무하시는 분들은 긍정의 횡포 속에 살며 웃음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불친절과 슬픔을 받아들여져야 할 경계점을 잘 찾아야 합니다. 슬픔도 받아들여져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내면 스펀지는 슬픔 패자와 행복 승자를 모두 받아들여야 합니다. 너무 행복에만 무게추가 옮겨져 행복 지상주의로 가면 끝은 더욱 허무할 것입니다. 소금물을 마시면 더욱 갈증이 나듯이 행복의 끝없는 갈증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슬픔이 흐르도록 열어주는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상처가 치유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처도 품고 그냥 일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상처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입니다. 어린아이도 느끼는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마음 감정의 기본 상태는 '편안한 슬픔' 입니다. 약간 더 슬픔이 과하면 감정의 디폴트는 '슬픔이 있는 편안함' 입니다.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다는 게 문제는 아닙니다. 떠나고 헤어지는 것을 힘겨워하지만 작별이라는 고통도 삶의 일부입니다. 상처를 반드시 치유해야하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잃게 되지만 사랑은 결국 다시 다른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최근 강아지를 잃은 어느 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법정 다툼을 하며 16번 소송을 당하며 삶이 피폐해졌지만 9년동안 버틸 수 있던 것은 강아지 였습니다. 강아지때문에 힘든 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는데 최근 그 강아지가 하늘 나라에 갔다고 합니다. 마치 자식을 떠나 보낸 것 이상 큰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분께 '훌훌 털어 잊어버리고 버리고 밝게 사세요' 라는 말은 더 큰 아픔을 줍니다. 울음이 멈출때 까지 작별하며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면 보통 그 사람 물건을 태우고 잊으려 합니다. 그가 돌아오면 신어야 할 신발이 있어야 하기에 신발은 하나 남겨둡니다. 이별에서 슬픔을 제거하는 마법은 없습니다. 슬픔을 이길수는 없고 슬픔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기억이 희미해지고 울음이 멈출때까지 슬픔을 간직한채 작별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는 남습니다. 슬픔은 쌓인 눈이 다 녹더라도 그늘진 골목에 눈이 남아 있는 것 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 눈이 다 녹기 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마음속에 슬픔이 있지만 골프장에서 9홀 후에 그늘막에서 막걸리에 사이다 혼합주를 같이 나눠 마실 때 행복합니다. 근심 걱정이 있지만 산 정상에 오른 후 컵라면을 먹으면 행복합니다. 슬픔은 감정의 디폴트이고 간헐적인 행복으로 일상을 살아갑니다. 고생을 하며 성과를 내서 진급 메일을 받을 때는 좋지만 다시 과중한 업무에 눌려 슬픔으로 살아갑니다.
행복은 잠시이고 슬픔은 오랫동안 마음속 스펀지에 적셔 있습니다. 이 슬퍼하는 마음에 대해서 치유하기보다는 그냥 같이 포용하고 가는 것이 현명합니다. 슬픔까지 포용할 때 더 온화해지고 관대해집니다.
사무침은 행복과 슬픔 사이에 공존하며 간절하게 사랑을 찾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슬픔도 온전히 받아들이는 온화한 마음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