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 연구원이 직접 만든 프로그램을 보고 받은 충격이 컸다. 그 후 찾아온 무기력감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전 세계 모든 시니어 개발자가 겪고 있는 '성장통'일 것이다. 하지만 '의료기기 도메인 지식'을 가진 시니어 개발자에게는 단순한 코더와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지금 당장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현실적인 로드맵을 그려본다.
1. 경쟁하지 않고 ‘지휘’ 한다 (Coder -> Orchestrator)
바이오 연구원이 짠 코드는 '기능'은 수행할지 몰라도 완성된 '제품'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보조 도구일 뿐이다. 의료기기 소프트웨어는 단순 작동을 넘어 안정성, 유지보수성, 규제 준수(FDA/MDR), 보안이 필수다. 이것이 바로 시니어인 내가 맡아야 할 영역이다.
AI나 비전공자가 작성한 코드는 보안 취약점이나 엣지 케이스(예외 상황) 처리에 약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코드를 가져와 규격에 맞는지 판단하고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AI 도구의 마스터가 되어야 한다. Cursor, GitHub Copilot 같은 도구를 누구보다 잘 다루는 'AI 페어 프로그래밍의 달인'이 되자. 후배들에게 "AI로 초안은 이렇게 짜고, 검증은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서야 한다. AI 대장장이가 되어야 한다.
2. 도메인 특화 AI 전문가로 포지셔닝한다
일반적인 파이썬 코딩은 이제 AI가 더 잘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회사 기기가 생성하는 데이터의 맥락은 AI가 모른다. 사내 AI 지식 시스템을 구축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내재화를 통해 정교한 질문으로 우수한 코드를 뽑아낼 수 있어야 한다. 질문을 잘하는 것, 이것이 새로운 기술력이다.
3. '인공지능과 영성' 관련 책을 집필한다
무턱대고 AI 관련 유튜브의 단편적인 지식을 쫓기보다는 "인공지능과 영성" 집필을 강력히 추진한다. 책을 쓰는 과정에서 인공지능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될 것이다. 영성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기에 이 둘의 융합은 매우 중요하다.
AI 시대가 고도화될수록 기술적인 'How'보다 철학적인 'Why'가 중요해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영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반평생을 살아온 개발자가 답을 줄 수 있는 주제다. 이는 최고의 퍼스널 브랜딩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나를 '나이 든 코더'가 아니라 '기술과 인문을 통찰하는 사상가(Thinker)'로 만들어 줄 것이다. 이것이 은퇴 이후의 삶, 혹은 강연이나 자문역으로 나아가는 훌륭한 다리가 되길 소망해 본다.
4. 사내 'AI 혁신 스터디'의 리더가 된다
역할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가 모든 최신 기술을 다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야 한다. 비워야 채워지는 법이다. 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판을 깔아주는 역할'을 자처해 보자. 젊은 직원들이 새로운 AI 툴을 가져오면, 그것을 기존 시스템에 어떻게 안전하게 통합할지 멘토링해 주면 된다.
개발자로서의 불필요한 자존심은 버려야 한다. '개발자 꼰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폭넓게 수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조직 내 영향력을 키운다. 연구원들이 개별적으로 AI를 쓰는 것을 넘어, 개발팀이 주도하여 "전사적으로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AI를 활용하는 표준"을 만드는 TF 팀장을 맡아보자.
5. 구체적인 학습 로드맵 (Action Plan)
무작정 공부하기보다 타겟을 좁혀 집중한다.
Low-Code / AI Tools 익히기: Cursor 에디터, LangChain (LLM을 애플리케이션과 연결하는 프레임워크)의 기본 개념을 파악한다. 직접 밑바닥부터 코드를 짜는 것보다, 도구들을 연결하는 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데이터 리터러시: AI는 결국 데이터 싸움이다. 바이오 데이터를 어떻게 전처리해서 AI에 학습시키거나 참조하게 할지, 그 '데이터 파이프라인' 설계에 집중한다.
글쓰기 (매일 30분): '인공지능과 영성'의 목차를 잡고, 매일 A4 반 장이라도 쓴다. 글쓰기는 내 안의 두려움을 객관화하고 통제하는 최고의 수단이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온다. 지금 느끼는 공포는 AI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직 구체적으로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30년 전, 검은 화면에 커서만 깜빡이던 시절부터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왔다. 그 저력은 어디 가지 않는다. 단지 도구만 바뀌었을 뿐이다.
연필로 쓰던 작가가 워드 프로세서를 만났다고 해서 작가의 본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AI가 나타났다고 해서 개발자의 본질도 사라지지 않는다. AI를 만난 개발자는 코드를 입력하는 노동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설계'를 하는 창조자로 거듭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지금이 바로, 제2의 전성기를 시작할 때이다. 책을 집필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