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차이콥스키와 나이젤 케네디

콘모토의 명상적 음악듣기_02

by 콘모토

1978년 11월. 콘서트 찾아다니기가 내 생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가던 무렵, 그날도 나는 하교길 교련복 차림으로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그 해 봄 세종문화회관이 개관하였고 이름만 듣던 본고장 음악가와 오케스트라들이 꼬리를 물고 서울로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밥을 굶더라도 가능한 많은 콘서트에 가야겠다고 연초부터 작심하고 있었고, 세종문화회관 가기는 그 해의 내가 사는 이유의 하나가 되고 있었다.


그날은 서울시향의 정기연주회. 프로그램은 모두 차이코프스키의 곡들로만 구성되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비창> 교향곡. 연주 직전 장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사정상 예정되었던 <비창> 대신 교향곡 5번을 연주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심취해있던 비창을 실연으로 접한다는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있던 내겐 맥 빠지는 얘기였다. 누렇게 바래버린 40년 전 감상노트를 보니 그날의 연주진이 적혀있다. 지휘는 BBC교향악단의 지휘자 보리스 브로트, 협연은 나이젤 케네디다. 요즘 '클래식의 이단아'란 별명으로 인기를 누리는 바로 그 나이젤.


1990년쯤인가 음반사에 있을 때 Chandos 레이블을 통해 그의 <재즈 앨범>과 <엘가 작품집>을 내게 되었는데 내가 동료들에게 이 사람이 한국에 온 적이 있고, 내가 그 콘서트에 갔다고 하자 다들 그럴 리가 없다며 어이없어하는 하는 것이 아닌가(하긴 스물두 살 무명시절이었으니 누가 기억하겠는가?)


잘 알려지지 않은 22살 나이젤 케네디의 한국 데뷔 연주


답답해진 나는 마분지 박스 속에 쌓아두었던 지나간 음악회 팸플릿들을 모두 뒤져서 그의 사진과 이름이 들어간 프로그램북을 보여주고서야 동료들로부터 실없는 놈이 아님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나이젤은 몇 해 후 EMI로 옮겨 일약 슈퍼스타가 스타가 되었다. 2007년 나이젤의 내한연주 공연 전단에서 “2007년 5월 바이올린 슈퍼스타 나이젤 케네디 최초 내한”이라는 문구로 보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이젠 증거물을 모아놓은 박스까지 이사 통에 내다 버린 다음이라 어쩔 도리가 없게 되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은 감동을 넘어 충격이었다. 긴 곡이지만 처음 듣는 사람도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는 분명한 구성에 귀에 쏙쏙 들어오는 테마, 1악장 클라리넷의 음울하면서도 매혹적인 주제, 2악장의 호른 솔로에 이은 선율로 넘치는 현의 물결, 3악장의 우아한 왈츠와 4악장 페르마타 다음의 장대한 피날레. 흔히 차이코프스키를 통속적이라고 말할 때의 요소들이 다 모여있는 것도 같지만, 그의 통속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눈을 갖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교련복을 입은 고교 2년생의 온몸엔 이미 소름이 돋고 있었다. 어느새 프로그램이 비창에서 5번으로 바뀐 것을 고마워하면서.


바로 레코드샵으로 갔다. 가게 주인이 건네 준 것이 바로 데카 레이블로 나온 스토코프스키와 뉴필하모니아 반이다(PFS 4129 / SEL0150). 아마 광화문 주변의 어느 샵이었는데 내 기억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마르고 닳도록 들었다는 말이 적당할 것이다. 스토코프스키의 레코딩은 그만의 개성적인 소리를 갖고 있다. 레코딩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과 사운드 연출의 전문성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녹음 시에는 지휘봉을 내려 놓고 콘솔박스에서 직접 톤 컨트롤을 했다고 한다. 1882년생이라는 그의 세대를 생각한다면 이런 ‘첨단성’은 더욱 대단하게 느껴진다. 넓고 부드럽고 따뜻한 소리, 악기군별로 도드라지지 않고 잘 섞인 소리를 만들어내는 세련된 연출이 인상적이다. 이후 주로 러시아 계통 지휘자들의 연주로 수많은 레코딩을 접했지만 내 기억 속의 차이코프스키 5번은 항상 스토코프스키와 함께 있다.


<비창> 대신 들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의 감격


그 후로 지금까지 나는 과연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을 몇 번이나 들었을까. 아마 셀 수 없을 것이다. 30대까진 음반으로, 40대 이후엔 쭉 오케스트라에서 일했으니 실연으로. 더구나 곡상이 한국인의 정서에 꼭 들어맞을 뿐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연주 효과도 탁월하여 프로그램에 가장 빈번히 오르는 곡 아닌가. 공연기획자나 연주단체 관계자들은 정작 리허설이나 실연을 보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나는 거의 빠지지 않고 리허설을 보는 편이었으니 어쩌면 전 세계에서 나처럼 이 곡을 많이 들은 사람은 없을지도 모르겠다.(친구들에게 이런 농담을 하기도 한다..ㅎ)


휴일 아침 참 오랜만에 추억의 스토코프스키를 턴테이블에 올렸다.



1978년 세종회관 연주회에 감격해 공연 후 바로 구입한 스토콥스키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당시 유행하던 4 채널 녹음이다. 나이젤 케네디가 협연했던 그날의 프로그램 북은 이사 중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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