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가 사는 법

by 연우의 뜰


나는 화분을 잘 못 키운다. 웬만해선 키우기 쉽다는 다육식물도 내 손에 들어오면 모두 시들어버린다.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부러질세라 애지중지 보살폈건만 결국엔 모두 죽어버린다. 하지만 남편은 다르다. 시골 출신인데다 어릴 때 농사짓는 부모님을 많이 도와드려서 흙 만지는 손길도 남다르다.


한 달 전에 그 사람이 잎꽂이해준 다육식물에서 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시들시들 마른 숨을 몰아쉬던 잎들이 다행히 그의 보살핌을 만나 다시 살아난 것이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곧장 베란다로 가서는 한동안 옴짝달싹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알았다. 어떤 바람을 좋아하는지, 언제 물을 원하는지, 분갈이해줄 때가 되진 않았는지, 수시로 바라보고 챙겨주고 기다려주는 마음, 그것이 다육이를 살린 비법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좋고 싫은 게 분명한 나와는 아주 달랐다.


2.png 남편의 다육식물 잎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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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그 남자는 특별한 개성도 남다른 특기도 없었다. 목수였던 아버님의 영향으로 뒤늦게 가구디자인과에 입학했다고 한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곧장 삼익가구에 취직했으나, 그 해가 이 회사 저 회사 할 것 없이 부도가 났던 IMF 때라, 디자인부서로 들어가선 가구는 커녕 연필도 잡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사교성이라곤 눈 씻고 봐도 없는 사람이 밥벌이를 위해 영업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지금은 믿기지 않을 만큼 이 분야에 선두에 있지만, 영하 10도의 추위에도 청재킷 하나로 버티던 스물일곱 청년이 어느새 탈모로 이마가 훤하고 어깨도 구부정해진 쉰둘 중년이 된 것을 보면 그의 고단함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혼자 자취하는 그 남자가 가여워 결혼을 결심했다. 그 해 태풍과 홍수로 신혼 3개월 만에 8평짜리 지하 원룸이 물에 몽땅 잠겼다. 하수구까지 역류하여 어렵게 장만했던 TV, 냉장고, 세탁기들이 둥둥 떠다녔다. 빈털터리에 갈 곳도 없어 친정에 들어가 방 한 칸에서 살았다. 계속되는 유산으로 몸도 마음도 지쳤다. 모아둔 자금을 모두 털어서 시험관시술을 했지만, 그마저 3번이나 실패하면서 난임 우울증에 시달렸다.


모든 부부가 그러하듯 이혼을 결심하던 때가 있었다. 남편에게 나쁜 술버릇이 있는 줄 그때 알았던 거다. 힘든 상황이 다가오면 올수록 남편의 폭력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던 그 남자는 내 앞에 눈물을 쏟고 무릎을 꿇었다. 술을 끊겠다는 약속과 함께 남편은 갑상선암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수술 후 5년이 지나 정기검진을 받던 작년 여름, 간경변이라는 또 다른 고비가 다가왔다. 주치의 선생님은 술을 끊어서 죽음의 고비를 넘긴거라며 아내에게 평생 잘하라고 하셨다.


나는 한 번도 그 남자의 핸드폰 단축키 1번이 된 적이 없다. 하지만 아직도 사랑하냐고 물으면 그는 여전히 잘 익은 살구처럼 수줍어한다. 몇 권씩 되는 내 일기장을 한 번도 몰래 쳐다본 적은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맥주가 떨어졌는지 냉장고를 수시로 열어본다. 읽어보라고 선물한 책들은 모두 라면냄비 받침대로 쓰이고, 장모님 앞에선 ‘잘 먹었습니다’ 한 마디를 안 하지만, 나이 칠순에 피아노를 배우는 장모님을 위해 몰래 중고 피아노를 선물로 드렸다.


그 남자는 이제 안다. 찬 겨울 서리 맞으면서도 어떻게 꽃이 피는지. 고통이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철들게 하는지. 상처가 어떻게 아물어 가는지. 그리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또 알고 있다. 건강하다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건강을 잃고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얼마전 남편이 사직서를 냈다.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사직서를 낸 남편을 생각하면 우리가 부부인가 싶다가도 고열에 자면서도 끙끙 앓는 소리는 내는 남편을 보면 그 동안 애썼고 잘 견뎌줘서 고맙다는 마음이 더 앞선다. 찌들고 고단한 얼굴에 다시 생기를 되찾아줄 때를 늦추면 안 되니까.


햇살이 좋아서 베란다 창가에 앉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다육식물이 어서 와 하면서 환하게 웃어주는 것 같았다. 때마침 주말이라 시골 집에 내려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시골집 텃밭에 샤인 머스킷 다섯 그루와 체리 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단다. 땀에 흠뻑 젖은 하얀 와이셔츠에 밀짚모자를 쓴 제법 농부 티가 나는 그 남자의 모습이 흐뭇하게 그려졌다.


바람이 불어 오면, 부는 대로 흔들려야 바람이 잘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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