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by 연우의 뜰

2월은 나를 슬프게 한다. 국문학과에 지원했다가 떨어져 졸업식에 가지 못하고 우편으로 받은 졸업장은 나를 슬프게 한다. 팬티 안주머니에 돈을 감추며 항상 ‘돈 없다’ 하시던 할머니가 지폐뭉치를 이불에 놓고 돌아가신 2월은 나를 슬프게 한다.

부르기만 해도 입술부터 떨리는 광화문은 나를 슬프게 한다. 부모님께 처음으로 2만 원 용돈 받던 날 낯선 빌딩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맸던, 간호전문대 원서 사느라 추운 겨울 길게 줄섰던 교보문고는 나를 슬프게 한다. 전경들이 신분증 검사한다며 길을 막고, 최루탄 가스에 눈물 콧물 쏟아내며 분노와 절규로 가득했던 세종문화회관 계단은 나를 슬프게 한다. 가끔 그 사람이 그리워서 눈이 흔들리는 날엔 어김없이 이문세의 ‘옛사랑’이 흐르던 덕수궁 돌담길은 나를 슬프게 한다.


‘시월’을 부르면 시리다고 들리는 가을은 나를 슬프게 한다. 바다에 가서 울고 싶어 결국 바다에 갔으나 눈물은 나오지 않고 할머니 치맛자락을 꼭 붙들고 서 있는 것처럼 그냥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정채봉님의 글은 나를 슬프게 한다. 추워서 코가 새빨갛게 되어도, 수없이 전차가 왔다가도 움직일 줄 모르고 엄마를 기다리는 그림책 '엄마 마중'의 주인공 아가는 나를 슬프게 한다. 학력고사 앞두고 야간자습 몰래 빠져나와 명동극장에서 봤던 '사랑과 영혼'의 마지막 장면, 천상으로 올라가는 샘을 바라보며 흘리는 몰리의 영롱한 눈물은 나를 슬프게 한다. ‘죽도록 사랑했기에 가혹했던 이별에도 후횐 없었다오’ 가사를 깊고 나지막이 부르는 김동률 목소리는 나를 슬프게 한다.


라면 먹고 잤다고 종일 자책하며 다이어트를 평생 숙제처럼 떠안고 사는 여자가 나를 슬프게 한다. 설렘을 잃어버린 연인들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스마트폰 두드리는 풍경은 나를 슬프게 한다. 힘을 내려놓아야 할 순간에 ‘힘내’라는 이모콘티 문자는 나를 슬프게 한다. 한때는 내 청춘의 대변인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입을 봉쇄한 빨간 우체통, 쓰레기만 늘어선 공중전화기는 나를 슬프게 한다. 출렁이는 파도에 노 젓는 꿈을 매일 밤바다 삼키는 바람아래 해변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조각배 한 척은 나를 슬프게 한다.

슬그머니 팔베개를 빼며 젖먹이를 두고 나이트 근무 출근하는 젊은 간호사의 빠진 머리카락은 나를 슬프게 한다. 잘나가던 회사에서 명예퇴직 당한 후 가족들 모르게 추레라 면허를 따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루 2번씩 왕복하다가 졸음 쉼터에서 말뚝잠을 자는 중년의 남자는 나를 슬프게 한다. 폭우가 쏟아지고 폭설이 쌓여도 매일 첫차를 타고 항상 똑같은 자리에 앉아 이리저리 머리를 떨구는 사람들은 나를 슬프게 한다. 견딜 만큼 견뎠지만 더 감당할 수 없어 사직서 내미는 딸만 셋인 워킹맘의 두 손은 나를 슬프게 한다. 저마다 먹은 만큼의 상처와 소독약이 첨가된 밥벌이는 나를 슬프게 한다.


서럽고 억울한 일이 몰아 칠 때마다 하늘을 향해 돌아가신 엄마를 소환하는 친구의 간절한 외침은 나를 슬프게 한다. 행여나 자식들이 전화할까 봐 휴대폰 꼭 잡고 요양원 창가에 매달려 있는 할머니는 나를 슬프게 한다. 시집간 딸 출근하고 없는 빈집에 층층으로 냉장고 가득 채우고 몰래 나서는 친정엄마의 ‘단 한 번만이라도 엄마가 있어 봤으면 좋겠다’는 그 소원은 나를 격하게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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