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봉터미널

[오십, 연약함의 힘]

by 연우의 뜰


어린 시절 우리 집 금고는 할머니 팬티였다. 집안 살림을 할머니가 도맡아 하셨는데, 팬티 안주머니에 한 번 돈이 들어가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반찬은 늘 김치, 단무지, 깍두기였고, 고기나 생선은 명절이나 제사 때만 먹을 수 있었다. 라면이나 소시지, 달걀은 할머니 주머니에서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과자나 학교 앞 떡볶이가 먹고 싶었는지. 학용품이나 교재 산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용돈을 받았었다. 은행에 돈을 입금하지 못하셔서 지폐 둘 곳이 없을 때는 아랫목 장판 밑에 숨겨두시기도 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 할머니 심기가 좋지 않아서 딱 한 번 장판밑에 있는 만 원 한 장을 몰래 가져간 적도 있었다. 나는 세상 할머니들은 다 무섭고 냉정한 줄 알았다. 친구는 자기 할머니는 오실 때마다 용돈과 선물도 주시고, 외식하고 놀이동산도 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난 믿지 않았다.


할머니는 말씀도 거의 없었다. 늘 근심 가득한 눈빛으로 먼 곳만 바라보셨다. 가끔 가요무대나 전국노래자랑을 보실 뿐, 드라마도 시큰둥하셨다. 동네 할머니들끼리 모여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열 권은 된다며 똑같은 레퍼토리로 수다를 떠실 때도 우리 할머니는 없었다. 늘 혼자 계셨다.


일제 강점기에 한 가문의 장녀로 태어나 집안일과 동생들을 보살폈던 일, 열여섯 어린 나이에 가난한 종갓집, 게다가 7남매의 맏이와 혼인하여 온갖 시집살이에 갓 출산한 시동생들을 키워야 했던 일, 남편이 술만 드시다가 중풍으로 쓰러져 느닷없이 생계를 위해 밤낮으로 도라지 까서 시장에 내다 파셨던 거, 먹을 게 없어서 수제비만 먹었다는 거, 그리고 당신의 칠 남매 자식들은 학교도 제대로 못 보내고 시집과 장가보낼 때 돈 한 푼 주지 못한 수많은 애환들을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집안 어른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귀동냥하며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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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할머니에게도 생기가 돋는 날이 있었다. 상봉터미널에 가는 날이다. 마치 연애하는 처녀처럼 들떠있고 분주하셨다. 경기도 여주에는 남동생이, 양평에는 여동생이 살고 계셨는데, 꼭 상봉터미널로 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가신다고 했다. 버스 시간을 놓치면 낭패였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서울 양천구 신월동이었는데 바로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산 밑에 비탈진 골목마다 빽빽하게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였다. 한참을 걸어 내려가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만 상봉터미널에 갈 수 있었다. 멀미도 심하게 하셨는데, 거기서 또 시외버스를 타고 양평이나 여주로 가야 하는 고난의 길이 할머니에게는 행복이었나 보다. 친정 가는 길이라 그러셨을까.


돌아오실 때는 동생들이 싸주신 보따리들을 잔뜩 가지고 오셨다. 참기름, 들기름, 콩, 팥, 말린 호박, 말린 고사리……. 작은 키가 더 쪼그라들도록 머리에 이고, 손이 빠지게 들고 오셨다. 그리고는 또 오랫동안 표정 없이 지내셨다.




그때 나는 만나고 헤어지는 일,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그곳을 모두 ‘상봉터미널’이라고 부르는 줄 알았다. ‘상봉’ ‘상봉’하고 부르면 왠지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항상 ‘돈 없다. 돈 없다’ 하시던 할머니는 지폐뭉치를 이불에 펼쳐놓고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누런 월급봉투를 할머니께 드렸다. 할머니 나이 70세였다.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신다. 초록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니 아득해진다. 그리운 사람들로 더 아득해진다. 그립다는 것은 쓸쓸하다는 것일까. 단 한 번도 다정하게 불러주신 적 없던 냉정했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황지우 시인은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라고 했다.

나도 상봉터미널에 가보고 싶다. 그때 할머니처럼 터미널 가는 길의 설렘을 느끼고 싶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평생 외로우셨을 할머니를 안아드리고, 장미꽃 가득한 중랑천 길을 손잡고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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