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연약함의 힘]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뇌 과학자에 의하면 길어야 3년이란다. 사랑에 빠지면 뇌의 시상하부에서 도파민과 페닐에틸아민이 차례로 분비되어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다가 사랑에 눈이 멀게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는 말이다. 머릿속에는 온통 그 사람 생각뿐이고 눈에는 그 사람만 보인다. 밤새 기다리며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이 기간은 18개월, 길어야 30개월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콩깍지는 벗겨지고 사랑은 끝난다.
사랑이 뭐 이렇게 무례한가 싶다가도 한순간 불꽃같은 사랑이 꾸덕꾸덕하게 말라버린 우리의 낭만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릿아릿하게 해 주니 너무 탓할 수만도 없다. 게다가 열렬히 사랑했던 순간보다 애가 타게 기다려지고, 보고 싶던 그 설렘은 얼마나 짜릿했던가. 그러니 사랑의 호르몬은 호르몬 그 이상의 위력이 있다. 내게도 막 피어나는 봄의 아지랑이 같은 사랑이 있었다. 느닷없이 다가와 예고도 없이 가버린 사랑이 있었다.
1995년 봄날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병동에 그가 새로운 인턴으로 왔다. 그에게서는 항상 빛이 났다. 큰 키에 반듯한 어깨가 하얀 의사 가운을 더 빛내 주었고, 긴 앞머리로 살짝 보이던 눈빛은 부드럽고 예리했다. 여자들만 있는 간호사 스테이션에 남자의 힘이 필요할 때 주저 없이 도와주었고, 자주 병실을 방문하여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은 인술에다가 찐한 동료애까지 겸비했다며 분명 좋은 의사가 될 거라고 이구동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 당시 낭만닥터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입사한 지 고작 3개월밖에 안 된 신규간호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은 키에 매력 없는 마른 체형, 까만 얼굴에 눈망울만 부리부리하게 컸다. 화장도 할 줄 몰랐다. 대답을 크게 안 한다고 선배 간호사에게 꾸중 듣는 날이 많았다. 일 년 휴학해서 동기들보다 나이만 많았지 겨우 졸업할 정도로 학교 성적도 뒤처졌던 터라 늘 기죽어 있었다. 곧 소나기라도 내릴 것 같은 먹구름을 머금은 날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도 선생님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하루는 그 인턴의 근무시간이 끝나고 교대한 후였다. 위출혈 환자분이 응급실 통해 입원했는데 지혈이 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동료 인턴 혼자서는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퇴근하지 않고 남아서 동료 인턴을 도왔다. 주치의 처방대로 지혈을 위해 엘튜브( (L-tube, 코를 통해 식도를 거쳐 위 속으로 삽입하는 관)를 위에 삽입해서 얼음 생리식염수로 이리게이션을 했다. 쉽게 지혈이 되지 않았다. 2시간이 넘도록 이리게이션은 계속되었고, 그러면서도 그는 옆에서 함께 어시스트하는 나에게도 현재 진행되는 치료에 대해 쉽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직 인턴이라 두려움도 많았을 텐데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올까’하는 생각과 함께 땀과 혈흔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멋진 남자는 처음이었다. 아침이 밝아왔다. 눈부신 햇살이 온통 그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그 사람 생각뿐이고 눈에는 그 사람만 보였다. 심지어 눈을 감아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꽃처럼 그 사람이 내게로 왔다. 밤 근무가 계속 이어지는 날이었다. 온몸이 쑤시고 열이 오르는지 으슬으슬 춥고 떨렸다. 점점 기운이 없고 늘어져 몸조차 가누기 힘들었다. 겨우 병실 라운딩을 마치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챠팅 하는 중이었는데, 가늘고 긴 손이 내 이마를 짚었다. “괜찮아요? 최간호사님, 열이 많이 나는 것 같은데...”
그가 우리 병원에서 인턴 근무 동안 우린 함께 마로니에 공원을 걸었고, 로맨스 영화를 보고, 달콤한 사랑 노래를 불렀다. 가난하고 볼품없는 내가 이렇게 멋진 남자를 애인으로 만나도 될까 두렵기도 했다.
‘아, 사랑이 끝나가는구나!’하고 이별을 감지하게 될 때가 온다. 다시 만날 수 없고 볼 수 없다는 의심을 해 볼 겨를도 없이 이별이 온다. 슬프게도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먼저 느낀다. 그가 두 달 동안의 우리 병원 근무를 마치고 지방 병원으로 갔다. 그 후로 하루에도 열댓 번씩 울리던 삐삐소리가 점점 뜸해졌다. 어쩌다 연락되면 영혼 없는 무심한 목소리에 나는 이별을 예감했다.
한 달 후면 인턴 수련을 마치고 본원으로 복귀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 사람이 파견 나간 충남 보령에 있는 병원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간밤에 몰아친 태풍으로 중도에 기찻길이 끊어졌다. 막막했다. 결국 택시로 갈아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곧 나온다던 그는 3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급한 환자 때문에 못 나온다는 말을 동료 인터에게서 들었다. 밤새 기다리고 싶었지만 나이트 근무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서울로 돌아왔다. 먹물 같은 눈물이 얼굴을 까맣게 칠했다.
사랑은 변한다. 잔인하지만 맞는 말이다. 열렬히 사랑했던 남자가 떠날 때는 새로운 사랑이 나타났거나 여자가 지겨워졌기 때문이다. 재개봉한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았다. 평범한 대학생 츠네오는 어느 아침 언덕길에서 낡은 유모차를 타던 다리가 불편한 소녀 조제와 마주친다. 퉁명스럽지만 온종일 독서로 살아가는 조제의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츠네오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제의 장애라는 짐에 지쳐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결국 그녀를 떠나 예전 여자 친구에게 돌아가기로 한다. 츠네오의 마지막 혼잣말이 떠오른다.
‘우리의 이별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 이유는 한 가지다. 그냥 내가 도망쳤다’
십여 년 세월이 지나 우연히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 전문대 졸업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어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할 때였다. 중환자실 실습으로 병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맞은편에서 그가 내려오고 있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순간을 수없이 많이 상상했었다. 세월이 흘러 희끗희끗 머리를 흩날리는 어느 날 느닷없이 극적인 해후가 이루어지는. 잠잠했던 일상이 파도에 휩싸이게 되는.
첫사랑은 프로포폴 같다. 오래 잠들지 못하고 금방 깨어난다.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 무모한 감정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니 나를 향하던 불꽃같은 사랑이 꺼졌다고 당황하지 말자. 사랑은 원래 그런 거다. 다만 사랑의 유효기간이 다를 뿐. 짧으면 18개월, 길어야 30개월이라는 건 논문 결과일 뿐, 사람에 따라서는 몇 개월짜리 사랑도 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