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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주 May 11. 2018

돈에 있어선 순진해선 안돼


"너희 집이 그렇게나 어려워?"

돈이 없어서 어쩔 수가 없다는 나의 하소연에 무심히 돌아온 말이었다. 의심가득한 눈빛으로 나에게 질문해 오는 두 사람이다. 정말 모르겠다는 눈빛이다. 

"너 그렇게 안보여."

 무엇인가 안심되었다. 내 안에서 가난이 엿보이지 않는다니. 하지만, 곧 다시 마음이 괴로워졌다. 서울 강남에서 태어나 내내 그 곳에서 자란 그 들에게 나의 가난을 증명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몹시 애정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야속함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의 가난, 우리집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보이려 내 스스로 노력한다면 내 자신이 하찮고 하잖은 존재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최근에 나는 돈이 다르게 보인다. 세상 돌아가는 방식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세상이 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이 나에게 스며들어 오는 느낌이다. 돈의 힘. 힘있는 돈. 그 안에 내재한 의미와 실제적인 작용을 나는 이제서야 뒤늦게 알아가는 중이다. 내가 돈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고, 또한 순진했는지 촘촘히 깨닫는다. 가장 친한 친구가 무심히 벗어 던진 추리닝 자켓이 알고 보니 아르마니였다. 엄청 잘 사는 친구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부에 대한 실감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누군가의 눈에는 엄청 가난한 애와 엄청 부자인애가 함께 친구인 재미있는 장면처럼 비춰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윌스미스는 지독한 가난을 깨기 위해 영화 내내 뉴욕시내를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영화는 실로 참담한 생계의 연속이 펼쳐진다. 가난을 견디다 못해 집나가 버린 아내에, 방세를 내지 못해 집까지 잃고, 모텔을 계속 전전하다가 공중화장실 노숙 신세에 처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나에게 남은 인상은 하나뿐이었다. 가난한 생활이 얼마나 참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각만이 나에게 잔존했다. 가난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 수치심으로 삶의 존엄도 무너질 수 있었다. 나는 그 붕괴의 과정을 멀찍이서 감탄하며 구경했다. 

    이상한 부분은 나는 가난의 한복판 안에 있는데 그 영화 속 윌스미스의 삶을 단지 관광한 지점이다.내 일이 전혀 아닌 양 거리를 두고 있는 내 의식은 상황을 따지자면 사실 부적절한 것이었다. 우리 집이 저 정도는 아니지, 싶다가 과연 그랬나?하는 의문이 든다. 아버지가 공포에 질려 가족의 붕괴를 걱정하던 시절이 엊그제 인데 말이다. 아마 내가 열심히 돈의 중대성을 무시하고 싶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돈을 기준으로한 시선이 나에게 탑재되는 순간, 나는 사회의 하급계층으로 내 자신을 강등시켜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내가 이렇게 돈에 대해 순진하고 돈과 관련된 문제를 남의 일인 양 바라 볼 수 있던 것은 사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덕분이다. 너무나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평생을 돈 때문에 필사적으로 사셨다. 돈 버는 것 이외에 취미 하나 가지시는 것이 없는데도 우리집은 아직 힘들다. 대체 얼마나 더 열심히 사셨어야 우리집은 가난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 세상의 시스템은 단단히 잘못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런 부끄러움 끝에 돈에 대해 생각해보면, 돈이 주는 행복은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싶다. A와 B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A 와 B 둘 다 그냥 가져버리면 되는 것. 거기에서 오는 여유. 그 여유가 없음이 왜 수치심까지 연결되어야 하는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여유가 있고 없음에서 위계가 만들어진다. 

이 처절한 생존 게임에서 나의 부모는 나를 돈 없어 보이지 않게 키우셨다. 구김살 없는 표정, 커다랗게 퍼지는 웃음소리를 가진 티없이 맑은 나로 키운 것이다. 이 천진난만함이 아마 내가 돈없어 보이지 않는 이유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죽어라 열심히 해야한다. 나를 순진하게 키워준 나의 부모님을 덜 절박하고 덜 막다른 길에서 살지 않도록 여유롭게 해드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돈은 삶을 유지하는 수준이면 족하다. 타인이 혹은 내 자신이 내 가치를 평가하는 지침으로 작동하도록 두어서는 안된다. 그런 기준을 가지고 속좁게 살라고 나의 부모님이 나를 그렇게 치열하게 키우시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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