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귀한 건 담을 수 없다
500M 길이 밖에 안될 것 같은 백사장의 모래가 유난히 곱다. 얕은 파도가 칠 때마다 자연히 발가락 사이를 흘러 지나가는 간지러운 모래도 좋고, 힘껏 발가락을 오므려 발가락으로 쥘 때면 왠지 속이 시원하다.
낮에는 지붕이든 아스팔트 도로든 다 뚫어버릴 것 같이 비가 쏟아질 때는 언제고, 말끔히 갠 바다에 오전 비의 흔적이라곤 비교적 높은 파도가 치는 것 뿐. 월정리 바다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밀물 때는 백사장 전체가 물바다가 되더니 오후 6시, 해가 뉘엿뉘엿 거리는 지금은 바닷물들이 쏵 빨려나갔다. 물 속에 잠겨 울렁대는 검은 그림자 같던 바위들이 백사장 위에 떡하니 위용를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나 다르다.
어느 바다가 좋았냐고 묻노라면, 배터지게 전복뚝배기를 먹고 나와 딱 마주했던 바다가 최고다. 물속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가고 걸어 들어가도 수심은 고작 내 발목 언저리. 뒤에 돌아 보이는 한가한 카페들은 한참이나 아득한데, 기분 좋게 찰랑이는 바닷물은 겨우 내 무릎 아래. 아마, 아침에 퍼부운 비의 영향으로 바다가 약간 맛이 간 것 같다. 60M정도 수평선을 곧장 마주해 들어왔는데 겨우 개울물 깊이라니. 세상이 전부 바다인 것 같은 기분. 하늘은 바다를 비추는 거울인 것 같은 착각. 가끔 크게 치는 파도는 내 치마 밑자락을 위협한다. 멍때리고 있다간 10년된 친구의 손길처럼 엉덩이를 때리고 간다. 덕분에 내 치마는 자연스레 그라데이션이 생겼다.
하지만 바로 이 때, 내 휴대폰의 배터리는 기가 막히게도 1%만 남아있었다. 나머지 보조배터리는 일찌감치 나가있었고, 그 황홀하게 쳥량한 순간을 어떻게든 남겨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이 순간 미간주위에서 뱅뱅돌았다. 카메라 어플을 키자, 당연하듯 배터리 없어서 못찍는다는 소리를 뱉더니, 삐리릭 소리를 내며 죽어버렸다.
내 삶 속에서 손에 꼽힐 그 진경을 담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죽도록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비를 퍼붓던 오전의 바다도 사진 하나 없다. 길거리의 현무암 돌땡이 하나하나 남기고자 사진을 찍어댔는데, 역설적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단 한장도 영구히 남겨내지 못한 내 스스로에게 짜증이 치밀었다. 어젯 밤 게스트하우스에서 충전을 완벽히 안한 것, 전복뚝배기를 먹으며 배터리를 왕창 쓴 것. 애꿎은 사진만 엄청 찍은 모든 내 자신이 미움으로 덮쳐왔다. 짜증으로도 왔다. 이윽고 작은 우울감으로도.
짙지만 얕은 감정의 소용돌이 끝에, 바다가 다시 보이는 6시 옥상 카페에서 글을 쓴다. 글을 쓰고 마음을 정제하니, 아. 귓머리 뒤에서 작은 스파크가 일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가장 귀한건 담을 수 없다. 자명하고 평범한 그 사실, 혹은 진리에 순응하자 평화가 온다.
모든 순간 월정리의 바다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