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으로 사랑하지 않기를

너의 결핍이 나를 소모시킨다.

by 몽주

"언니야. 자? 자겠지?"

주말 아침 8시 45분의 무언가 어색하고 난 데 없는 연락. 카톡을 읽자마자 강한 절박함이 숨겨져 있음을 직감했다. 큰 일이 생겼구나-. 무슨 일인지도 어느정도 알 것 같은 기분이다. 3개월에서 6개월 정도의 텀을 두고 항상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들고 연락하는 친구니까.

"언니 바쁜 거 정말 아는데, 30분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고통 속에서 도움의 손길, 빛 한줄기를 간절히 요청하는데 내 바쁨이 얼마 만큼의 크기라고 해서 이를 뿌리칠 수 있을까. 차분히 이야기를 들었다.


사귄지 2주 된 그녀의 남자친구는 현재 감금상태라고 했다. 아들의 모든 대소사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는 어머니에게 연애사실을 들켜 집에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아들의 의사국가고시에 그녀가 방해가 될까 염려한 어머니의 처사다. 전화통화마저 들켜 휴대폰도 빼앗기고, 메일로 하루에 몇통씩 연락하는 상태. 그런데 그 메일도 어제부터 끊겨서 오늘은 완벽한 연락두절 중이란다. 대충 들어도 이제 겨우 말머리를 뗀 것에 불과한 것 같은 느낌인데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거린다.


숱한 정신병질의 시작은 부모이고, 종종 어머니가 진짜 핵심이다.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해야하는 어머니밑에서 그 안쓰러운 남자는 무슨 자유를 꿈꿀 수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었을까. 놀랄 것 없이 그는 상당한 정신적 증상을 가지고 있었다. 불현듯 찾아오는 호흡곤란 증세를 동반한 만성적인 불안. 그 남자는 누군가를 사랑할 여력이 있을까. 삶의 절벽앞에서 누군가를 끌어 안아봤자 온기를 품어낼 수 있을까. 의사가 될 것이 아니라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였다.


그녀는 몹시 남자친구를 걱정했다.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얼굴이라도 보고와야 안심이 될 것 같다고 하면서 나에게 허락을 구했다.

"지금 내가 남자친구 찾아가도 되는거지?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남자친구는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못 견디겠어."

결론만 원하는 그녀에게 나는 쉽사리 답을 줄 수 없었다.


연인이 심각한 고통에 처해있고, 심지어 연락이 되지 않을 때 겨눌 데 없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은 이해가 되지만 무언가 그녀의 고민은 어색하다. 상대가 없고 자기 자신만 있는 느낌. 당장의 불안을 어떻게라도 터뜨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목소리다.


나는 그녀의 절박함을 느끼지만, 신뢰할 수 없었다. 다만 반복해서 물었다.

"그 사람 진짜 좋아해? 진짜 사랑맞아?"

듣고 싶었던 대답과 전혀 무관한 질문을 하는 나에게 그녀는 변명처럼 자신의 감정을 늘어놓았다.

"사랑하는 것 같아. 다시는 이런 사람을 못 만날 것 같아. 그래서 이 사람을 내가 지켜줘야해."

이에 덧붙여, 그 사람이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약속을 했는지 열심히 설명했다. 어딘가 처량하다.

"내가 살인을 저질러도 나를 사랑할 것 같대."

"결혼하고 나면, 집에서 놀기만 해도 괜찮다고 말하더라고. 나는 나 편한대로 살라고."

쉽지만 달콤한 말이다. 그 남자가 그녀를 거짓말로 현혹시켰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신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훌륭할 정도의 불안앞에서, 삶의 저변이 위아래로 격렬히 흔들리는 순간에서 저러한 감정적 선언은 진심일 경우가 꽤나 있다. 다만 책임질 수 없을 뿐이지.


그녀는 취준생이다. 인턴 자소서도 쉽지 않은 요즈음에 그녀의 남자친구의 말은 정말이지 눈부시다. '이 사람이 부족한 내 삶을 메꿔줄 것이다. 내가 그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내 남자가 이미 무엇이 되었기에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된다. 그 사람의 무엇이 되었으니, 나는 충분하다.' 불확실성을 짊어지지 않고 확정되고 굳건해보이는 권위에 삶을 의탁하는 태도가 그런 공포와 절박함을 만들어내고,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을 금방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안하무인의 자세를 만들어 내는 아닐까. 사랑이 지나치게 구급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 신랄한 비판에 모순되게도 사실 나는 그녀를 성실하게 위로했다.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고, 만나자 하면 만나려하고, 결국 내가 약속을 파토당해도 핀잔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들여 억지로 버틴 것도 아니다. 그냥 자연히 그래야 하니까 했다. 내가 착해서라고 어떤 자부심을 내비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그녀들의 고통이 깊을 대로 깊어 비명을 지르고 있어 외면할 수 없었고, 내 선택이었다.


다만, 쓸쓸함이 남았다. 그래서 비겁하게 글로 화풀이하는지도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불쾌하다. "소모"된 감각을 지울 수 없다. "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불안"만을 당장 해소하려는 그녀에게 서운하다. 나는 소모되고 싶지도, 사용되고 싶지도 않다. 그저 나로서 누군가에게 의미를 가지고 온전하고 싶다. "연인과 헤어질 때 위로를 줄 상대"로 도구화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6개월에 한 번씩 주기를 맞춰가며 연락하는 그녀를 허무한 뒷다마라도 하지 않으면 용서가 안되는 것이다. 그녀의 결핍은 나의 바램을 사소하게 좌절시켰다. 저 쪽에 있는 집에 빵이 맛있다고, 산책하기 좋은 날씨니 산책하자고. 요즘 네 삶의 재미와 소소한 즐거움이 무어냐고 물으며 소통하고 공유하는 관계를 애정하고 쌓고 싶었다.


그녀는 어찌하여 나의 불편감을 눈치채지 못할까. 내가 아는 그녀는 선량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나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인데. 결핍. 스스로가 달래지 못한 삶의 허기를 보살피지 못하기 때문일까. 향기로운 관계는 서로의 결핍을 메꿔주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서로의 삶을 가꿔내고, 그 사이에서 이 것 한 번 맛좀 보라고- 한 입 떠먹여주듯 사랑스럽게 진행되야 하지 않나.


좀 더 솔직해지자면, 온전히 내가 떳떳한 삶을 살아왔다고 우렁차게 말하기엔 목에 얇은 실이 걸린 느낌이다. 내가 아닌 것에 나의 삶의 안전을 구하려는 시도. 부모와 사회의 기대속에서 생겨난 결핍의 구멍을 메꾸기 위해 여러 관계에, 사회적 지위에 내 삶을 의탁했었다. 세상에는 이를 성공한 많은 사람이 있는 것 같기도 하나, 나는 체질이 안 맞나보다. 정말 틀림없이 번번히 실패하거나, 내가 스스로 내려놓았다.


지금의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내뱉어본 이후 처음으로 나의 결핍과 무관한 사랑을 한다. 내가 불완전한 존재여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해서 사랑한다. 이 사실이 주는 그 자체로써의 충족감. 기분 좋은 뿌듯함.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좀 더 행복하는데 집중할 수 있는 상태. 지금을 알게 되니 이제는 예전의 결핍만을 메꾸는 관계로 회귀할 수 없어졌다. 나를 소모시킨 그녀도 지금 나와 같은 사랑을 하길 기대하는 것은 주제 넘은 바램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