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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주 Feb 15. 2017

화원을 기르는 사람들

세번째 CHEAG BAR 방문기

1Q84에 등장한 커티삭 하이볼과 그냥 메뉴판에 있는 위스키 하이볼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중얼중얼 고개숙여 물었다. 무식 폭로의 부끄러움 때문인지  책바 주인의 잘생김 때문인지 책바에서 술을 주문하는 순간은 아직까지 영 쑥스럽다. 커티삭이 조금 더 드라이하다는 설명에 망설임 없이 커티삭을 골랐다. 조금 더 낭만적인 선택에 작게 뿌듯했다.


평범한 물컵같은 잔에 레몬 몇개. 압생트와는 달리 별다른 기대없이 오늘의 술을 머금었다. 사람일은 종종 이상하게도  기대하지 않을 때 잭팟이 터진다. 와-. 완전히 내 취향인 술을 찾았다. 마셔본 술 중에 최고다. 조금 높은 도수. 은은한 레몬향. 얕게만 깔려있는 씁슬함이 내가 좋아하는 술의 특징들이었는데 이 술에 총집합 되어있었다. 이제 어디가서  커티삭하이볼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되겠다. 취향저격 술의 발견에 내 삶이 조금 더 풍요로워진 기분.


고개를 살짝 들어 왼편을 보니 올해 최고의 영화 라라랜드 포스터가 붙어 있다.  "최고의 환상적 영화!" 이런 식의 한국식 문구가 시선을 잡아뜯는 포스터가 아니라 라라랜드의 특유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고퀄리티 포스터다. 구하는 데 꽤 걸렸을 것 같다. 내가 앉은 테이블 위에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사진을 담은 액자가 놓여있다. 그의 음악을 한 번 들어보지 못했지만 책바 주인이 조성진을 좋아하나보다 싶다. 한번 쯤 들어보고 싶어 졌다.


발걸음을 옮겨 서가로 가보면 온통 김연수, 김영하, 무라카미 하루키 일색이다. "내가 이 작가들을 너무나 사랑합니다."라고 책꽂이가 우렁차게 소리친다. 나머지 책들도 다 그의 취향에 맞춰 섬세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짐작케 했다. 고개를 뒤로 젖혀 위스키 진열대 주변을 보니 지난 번 방문에 보지 못했던 영화포스터가 추가되었다. "너의 이름은"을 정말 재밌게 보셨나보다. 그 왼쪽에는 "231표 탄핵안 가결"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있는 신문 1면이 붙어있다(신문사는 깨알같이 문화일보다). 이 낭만적인 곳에 정치적인 문구가 걸려있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 순수성 때문인지 오히려 더 낭만적이다. 탄핵안 당시의 책바 주인이 느꼈을 흥분, 감동이 연상된다. 온통 책바 주인 정인성씨의 취향들로 작은 Bar 곳곳이 꽉꽉 섬세히 메워져있다.


평소 자신의 취향이 풍부하고 견고한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낙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지치고 고독이 삶을 침범할 때 쉴 수 있는 곳을 가진 이들은 매력적이다. 흔히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나는 그 세계에 물든다. 소리와 시선, 향기가 변용되고 뒤섞이며 스며든다. 조금 맛보았는데 달다. 당신은 얼마나 즐길 것들을 입안에 품고 있냐고 묻고 싶어진다. 오늘도 읽을 책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들고 갔지만 책바에 꽂혀있는 책들을 읽는데 훨씬 더 많은 열정을 쏟았다. 영화 취향, 음악 취향은 물론 쓰는 만년필마저 서로 똑같았던 내가 아는 한 연인은 얼마나 서로에게 매혹됨에 취약했을지.


 보통의 존재의 작가 이석원은 자기의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혼자 조용히 자신만의 화원을 가꾸는 것이라 표현했다. 낙원보다 한뼘 더 적확한 표현에 통쾌함과 감동이 인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꿔나가고 사랑하는 일. 마치 꽃을 기르는 일에 비유될 법하다. 씨앗을 고르고 물을 주고 자주들여다보는 일을 해야 꽃은 그 아름다움을 펼칠 수 있다. 책바는 정인성씨의 화원이다.


찬탄할 만큼 아름다웠던 라라랜드는 다미엔 차젤레의 화원이었다. 감독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즐기는 것들을 한 데 모아 영화적인 완성을 펼쳐놓은 것이 라라랜드였다. 아름다운 것들을 죄다  씹고 맛보고 즐기고 다해본 감독이 그 중에 소중한 것들을 세심히 골랐고, 그 아름다움에 대한 압도를 잘 전달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하는데 있어 진짜 고수고, 제대로 프로다. 강아지 주인이 자기 강아지의 가장 예쁜 모습을 안다. 주인이 찍은 사진 속에서 강아지는 제일 귀여운 법이다. 사랑이 깃드니까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런 원리로 라라랜드는 그토록 아름다웠을 테다.


나의 화원은 어떤 모습일까. 곱고 향기로운 꽃들을 잘 키워서 가장 그 아름다움이 빛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직은 씨부리기 단계여서 어떤 꽃이 자랄지, 어떤 향기를 내뿜는 공간이 될지 모른다.  풀꽃이 자라기에 적합하고, 그 수수한 아름다움도 당당하게 빛이 나는 공간이면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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