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살에 다시 시작하기
아이와의 밤산책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버리고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걷기'를 선택했습니다. 걷다보면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순간이 와요. 숨차서가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과 주변 풍경에 시선을 돌리면서 나를 잠깐 잊어버리게 돼요. 그 때 그저 '있다'는 감각만 남아 마음이 편해집니다. 꾸준히 걷다 보면 자신에 대한 신뢰도 생길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해주어서 혼자 더 많이 걷고 싶었어요.
정확히 9번을 채 다 채우지 못했을 때 아이와 걷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밤 집을 나서는 엄마를 울며 붙잡던 아이가 마음에 걸려, 데리고 나갔어요. 긴 시간 걷는 것이 힘드니까 따라오다가 금방 안한다 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이는 점점 즐거워하더라고요.
9시쯤 동네 천변을 걸으면 운동하러 나온 사람,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이 꽤나 많습니다. 배드민턴을 치고, 농구를 하고, 런닝을 하거나 개를 산책시키고 가족이 다같이 나온 모습도 보여요. 곳곳에 잘 설치된 운동기구를 이용해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도 많고요. 우리도 걸으며 운동기구도 해보고, 살짝 뛰었다가 수다를 떨며 걸으니 아이가 이 시간을 굉장히 즐거워하게 됐어요. 그렇게 남편과 같이 아이과 같이 걷게 되었어요.
엄마, 자신에게 희망을 가져
둘이서만 걸으러 나온 3번째 산책날. 우리 동네 천변 끝에 있는 폭포에 가자고 목표를 세웠습니다. 혼자 걸으면 꼭 폭포까지 갔다가 와요. 그래야 왕복 1시간이 조금 넘거든요. 같이 걸을 때는 아이의 컨디션에 맞춰 혼자 가는 것과 비교하면 중간 정도까지만 갔다 되돌아오곤 했어요. 엄마는 다리 너머 폭포까지 간다고 말해주니 어느새 아이에게도 목표점이 되어 오늘 그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어요.
운동기구도 두 번만 이용하고(이전엔 운동기구 전부 다 한번씩 해봤다), 왜가리와 오리 구경도 잠깐만 하고 (오리랑 왜가리 구경하느라 한동안 서 있기도 했었다) 폭포에 꼭 가자고 부지런히 걸었지요. 드디어 도달한 홍제천 폭포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돌아오며 문득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엄마한테 바라는게 있어?"
이건 오늘 하루 종일 아이에게 나쁜 말을 쏟아 불편했던 내 마음을 달래는 질문이었어요. 아이의 말을 듣고 고쳐야지 사과해야지 마음 먹었는데, 아이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어."
'엄마는 지금 상황이 안좋다고 하지만, 엄마 자신이 노력해가는 과정을 겪고 있잖아. 그런데 엄마는 희망을 안가지고 있어서 그래서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어'라고 이야기하며, 본인은 희망이 있노라고 차분히 말했습니다.
다시 떠올려도, 하나님이 아이의 입을 빌어 내게 이야기를 전한게 아닌가 할 정도로 큰 응원이었어요. 힘들어도 나를 벌써 포기하지 말라는 메세지로 들렸지요. 참 지혜로운 아이, 초3의 현명한 위로가 너무 고맙고 걱정을 안겨주어 미안했습니다.
어제의 나를 잊는 것부터
대한민국 40대의 자산 평균이 4억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평균만큼의 빚만 가지고 있어요. 보여지는 결과가 처참하니 자괴감이 나의 모든 것을 흔들었습니다. "그지 같아" 하루에도 10번은 말하고 생각하며, 불꽃같은 분노로 나 스스로를 짓밟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런 기분은 고스란히 가족에게 전해졌습니다.
산책의 말미에 아이에게 또 물어 보았어요.
나 - "너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뭐야?"
딸 - "내 인생을 잘 살아가는 거지"
오늘 뭘 했는지 생각하고 목표는 어땠는지 생각해 보면 되지 않겠냐고 어른처럼 뒷짐을 지고 말을 덧붙여요.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나 - "너에게 오늘은 어떤 하루였어?"
딸 - "어제 못 걷겠다고 찡찡대던 나를 잊고, 폭포까지 간 나 자신을 너무 칭찬해. 목표를 달성해서 너무 좋고 감격스러워."
우리 딸 자존감에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리액션을 했죠.
나 - "네가 찡찡대던 너를 극복했구나!"
딸 - "그게 아니라 어제의 나를 잊은 거지."
그래, 잊는 거구나! 그렇게 코칭을 받고 모임에 나가고 책을 읽으며 에고를 대패질하면서 겨우겨우 '나는 그래'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래서 못해'라는 틀을 지우는 일을 힘들게 하고 있었는데, 아이의 한 마디에 그냥 어제의 나는 잊는 거라는 걸 깨달았어요.
어제의 힘듦 극복하려하지 말고 그냥 다시 시작하기
최근 2, 3일 너무 우울했습니다. 내 한계는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어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 의미없어 보이고 그간 쌓아온 무너져내리는 듯했어요. 아니 정확히는 제가 무너뜨렸습니다. 나는 안되는구나, 나는 못하는구나, 나는 이만큼이구나.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오만했구나. 그렇게 몇 마디 말에 나와 내 세계는 참 하찮아졌습니다.
아이의 위로로 답답한 마음에 조금은 풀렸습니다. 아이의 말에 의지해 다시 마음을 다져봅니다. 힘듦을 자기비하로 연결하지 말고 그냥 절망했던 어제를 잊고 오늘 다시 시작해보려 합니다. 스스로 무너뜨렸으니 스스로 다시 찾을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