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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사이 Feb 18. 2022

민트 초코맛

입체적인 민트빛깔 언어세공가

입체적인 민트빛깔 언어세공가
홍인혜의 언어생활 『고르고 고른 말』




불투명한 우리는 말을 통해 겨우 투명해진다.
_p.7 고르고 고른 첫마디


'마음의 거스러미'처럼 삐죽 돋아난 말에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좀처럼 되지 않아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말라고 격려하는 말에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점점 움츠러들었다. 카피라이터로 카피를 쓰고, 만화가로 『루나파크』를 그리며, 시인으로 시를 쓰는 '창의노동자' 홍인혜 작가의 언어 에세이 『고르고 고른 말』. 이 책에는 '매일같이 언어를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는 언어세공가'로 사는 저자가 경험한 말의 세계가 담겨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는 작가의 말에서 어떤 영혼의 잔상을 보게 될지 궁금했다.

'말이 취미이자 특기이고, 놀이이자 밥벌이인 언어생활자'인 저자는 일상과 여행, 사람과 일 사이에서 주고받은 언어를 다양한 관점에서 펼쳐낸다. 평면의 종이 위에서 풍부한 서사를 담은 말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저자의 말은 자신에게 고여있지 않고 타인과 세상을 향해 흘러간다.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며 부지런히 나아간다.



세상 모든 인간에겐 아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존재만으로 경이로운 나날들이 있었다.
_p.106 지극한 말 '아꼬와, 아꼬와'


'아꼽다'는 제주 방언으로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의미라고 한다. "너무 여리고 귀해서 시선에도 닳아 없어질까 아까운" 첫 조카 오름이 이야기는 존재만으로 사랑스러워 발을 동동 구르게 하는 작은 스타와의 만남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우리가 쓰는 말과의 첫 만남도 이처럼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황홀한 순간이 있었을 텐데. 더는 처음 같지 않은 언어를 새롭게 발견하는 저자의 섬세한 시선이 귀하게 다가온다.

유혹의 언어인 카피와 두드림의 언어인 시를 통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읽는 사람의 가슴에 안착하려 애쓰는 일. 저자는 '진심을 담은 다정한 말 한마디'를 고르고 골라 아름답고 배려하는 문장을 빚어낸다. 프리즘을 통과한 여러 색의 빛처럼 저자를 통과한 언어는 말이 되어 흐르고 다채롭게 빛난다.



나는 말을 만져보고 핥아보는 행위에 진심이다.
깨물어보고 터뜨려보는 과정이 짜릿하다.
천 개의 말에는 천 개의 맛이 있고, 천 개의 식감이 있고,
천 개의 향기가 있으니까.
_p.183 맛보는 말 '말에는 맛이 있다'


저자가 "말의 소믈리에가 된 것처럼, 수많은 말을 입에 머금고 미묘한 맛과 향을 구분해서 적소에 최선의 말을 배치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말을 가까이서 보고 또 한 발 떨어져도 보고, 여러 방향에서 살펴보았다. 말맛의 차이를 감지하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특별한 상황과 어울리는 고르고 고른 말에 한참을 머물렀다. 저자가 들려주는 언어를 다루며 언어를 바꾸는 일의 유용함과 경쾌한 발상의 전환에 귀 기울이다 보면 말에 맛과 향이 살아난다.

'말'을 발음하면 입안에 '알'을 품은 듯 둥근 공기가 잠시 머물렀다 새어나간다. 말이 품은 온기를 고스란히 담으려 마음을 다한 저자의 진심이 전해지는 듯하다. 저자는 나름의 방식으로 바를 부드럽게 만드는 바텐더처럼, 마음을 뭉근하게 풀어주어 글에 슬며시 녹아들게 만든다. 말을 다루는 전문가가 말과 함께한 세월을 머금은 언어로 다채롭게 그려낸 문장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선물한다.




시를 쓰고 읽는 것은 같은 시공간에 있으나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한 감각을 주는 것 같았다.
_p.199 허락하는 말 '막살이 자격증


시의 난해함이 낯섦이 되고 낯섦이 불편함이 되지 않길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책 곳곳에 스며있다. "보이는 것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다가온 시. 저자가 시라는 미지의 세계에 매혹되어 시인이 된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다. 저자는 시인으로 등단하고 마구 살아도 되는 '막살이 자격증'이 생긴 것만 같았다고. '시인이니까'라는 말로 해설이 가능한 상황을 읽으며 저자처럼 막살이 자격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글을 쓰다 보면 '막살이 자격증'을 받는 날도 있지 않을까.



말은 생각을 반영하고, 말은 생각을 조형한다.
_p.269 진화하는 말 '도둑에서 이웃으로'


이 책을 읽으며 최근에 생겨난 사람과 살지 않는 고양이를 부르는 새로운 언어를 알게 되었다. '도둑고양이'를 '길고양이'로 부르다가 '동네고양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마음의 변화가 명칭의 변화와 맥을 함께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누구도 해치지 않는 언어가. 더 크고 아름답고 배려하는 언어가." 태어나는 흥미롭고 멋진 일이라니. 언어가 바뀌면 인식이 바뀌기 때문에 말의 진화가 반갑고 기쁘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언어와 일상을 이어주는 말이 건네는 특별한 순간을 만난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잃은 줄도 몰랐던 일상의 빛나는 장면들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진다. 저자가 차곡차곡 갈무리해둔 기록은 낯설고 생경한 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더 자주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문장을 만나 다정한 위안을 받았다. 손이 닿지 않는 가려운 부위를 시원하게 긁어주는 글에 마음이 넉넉해지는 시간이었다. '꽝! 다음 기회에'라는 시간을 돌파해 '꽉! 다음 기회를' 잡을 용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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