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 1894 1부 끊어진 시위
1
동진강 옆 강둑 위. 그는 흐뭇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 보았다. 하늘은 높았고 강은 깊었다. 하늘과 강 사이로 구름이 흘렀고, 물살은 바람이 되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완성된 보는 그의 욕심을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백성들 위에 앉은 자. 말라가는 땅과 타들어가는 마음들을 보지 못했던 이. 나라의 녹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돈으로 자리를 샀던 자. 그 자리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했던 이. 고부군수 조병갑. 그는 보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워했다. 그곳에는 워낙 보가 있었으나 조병갑 자신을 위한 보가 아니었다. 다른 보가 필요했다. 잇속을 끝없이 채워줄 자신만의 보.
보를 짓는 데 돈이 들었다. 세금으로 충당했다. 보를 짓는 데 사람도 필요했다. 백성들로 충당했다. 이 자리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던가. 그 모든 것을 보상받는 것 같았다. 아니 그 보상은 반드시 받아야 했다. 백성들은 그에게 하늘이 아니라 땅이었다. 백성들은 땅을 일구어 곡식을 내었으나 그는 백성들을 일구어 욕심을 채웠다.
고부에 사는 백성들은 완성된 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돈을 내라기에 냈다. 와서 지으라기에 지었다. 알지도 못하는 군수의 부친 공덕비를 세운다며 돈을 걷은 적도 있었고 모친상을 당했다고 부조금을 걷으러 온 적도 있었다. 이렇게 받았고 저렇게 거두었다. 보에 끌어 모아둔 동진강 물을 썼다고 세를 또 받았다. 흉년이 들었으나 그들만의 흉년이었다. 그들은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몇몇이 모여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모아 관아로 향했다.
흉년까지 들어 어렵습니다.
저희 농사도 뒤로 젖히고 가서 보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세금을 받으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는 그 말에 답했다.
어딜 감히. 쳐라.
곤장을 맞은 이들은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중 한 사람은 몸이 해졌고 며칠을 앓았다. 맞은 자리에는 살점 대신 독이 올랐다. 그 독이 먼저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더니 다음으로는 눈을 뜨지 못하게 했고 결국은 깨어나지 못하게 했다. 죽은 이의 아들은 울었다. 주변의 이들도 함께 울었다.
2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게 되었고 산 자는 죽은 이를 부러워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승은 저승과 같게 되었고 저승은 이승처럼 보였다. 이승에서 짓눌려 숨을 죽이고 또 죽이며 살던 이들은 더 이상 죽일 숨이 없어 살 틈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뒤집힌 세상을 다시 뒤집자는 생각과 마음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타고 다녔다.
1894년 2월 중순. 고부. 내라면 내라고 했던 이들과 지으라면 지으라고 했던 이들의 빈손에는 낫과 괭이가 들렸다. 손에 쥔 것들은 각양각색이었으나 품은 마음은 한 갈래였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였다. 고부관아로 몰려가는 이들의 맨 앞에는 전봉준이 있었다.
칩시다.
관아의 문이 밀리고 깨졌다. 격노한 이들이 관아로 세차게 흘러 들어갔다. 창고를 열어젖혔다. 빼앗긴 쌀이 민중에게 돌아갔다. 동진강 옆 보가 무너지고 깨졌다. 갇혔던 물이 동진강으로 돌아갔다. 군중은 관아의 무기를 빼앗아 위세를 더했다. 잡혀야 하는 그는 소식을 듣고 먼저 도망했다. 그 밑에서 손발이 되어 큰소리를 내던 이들은 무릎을 꿇고 벌벌 떨었으나 그 모습이 분노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한 사람의 뜨거운 탐욕은 불씨가 되어 더 거센 불을 댕기고 말았다. 그 누구도 불이 닿는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랐지만 한 가지는 명확해 보였다. 이제는 잡을 수 없는 불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