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뿌리

갑오, 1894 1부 끊어진 시위

by 서린

1

거사는 성공적이었다. 왕과 왕비가 그들의 수중에 있었고 민씨 일파 주요 인물들을 제거했다. 주동자들은 내각을 세우고 요직을 나누었다. 아침이 되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음을 세상에 알렸고 외국 공사관과 영사관에도 알려 지지를 호소했다. 옥균을 비롯, 뜻을 함께 한 이들이 꿈꾸던 날이 하룻밤 사이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새로운 세상을 열였는데 그 세상이 조용했다. 환호성이 들리지 않았다. 청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첫발을 딛었는데 세상은 조용하고 불안했다. 그 조용한 물결 아래로 입궐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한 이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청국 총독 원세개를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


궁궐로 입궁하여 청의 군대를 요청하라고 왕비에게 은밀히 전하라.


원세개의 말이 그대로 궐 안으로 조심히 옮겨 갔고 왕비의 귀로 은밀히 전해졌다. 왕비는 경우궁이 좁으니 창덕궁으로 돌아가자고 왕에게 말했고 왕 또한 같은 뜻이었다. 하지만 옥균의 뜻은 달랐다. 왕의 거처가 넓을수록 빈 틈이 커질 것을 알았다. 경우궁을 둘러싼 병력은 많지 않았다. 창덕궁으로 옮겨가면 움켜쥔 손을 펴는 것과 같을 것이었다.


계속되는 요청에 옥균은 어쩔 수 없이 경우궁 근처 좀 더 넓은 계동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창덕궁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계속 물리쳤으나 이어지는 끈질긴 요구에, 일본 공사가 수락을 하고 말았다.


창덕궁으로 간다고 해도 우리 병력으로 충분히 지켜낼 수 있습니다.


표정이 굳은 옥균을 일본 공사가 달랬다. 결국 왕과 왕비는 창덕궁으로 환궁하였고 거사를 일으킨 자들도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12월 5일 오후 5시. 난을 일으킨 지 하루도 채 안 지난 때였다.


2

창덕궁 안에서는 새 나라를 세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재정과 군사, 법률과 외교 등 나라의 기틀을 잡는 논의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이제 조선은 어제와 다른 조선이 될 것이었다. 임오년 난리 후로 조선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던 청으로부터 벗어날 것이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개화된 세상으로 변모할 것이었다. 벅차올랐고 희망으로 가득했다.


창덕궁 밖에서는 청의 군사들이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위기에 빠진 조선의 왕과 왕비를 구할 것이라 했다. 반란의 무리들을 처단할 것이라고 했다. 오늘의 조선은 어제의 조선과 같아야 했다. 임오년 후로 단단히 움켜쥐었던 것을 놓칠 수는 없었다. 청은 이미 서구로부터 많은 것을 잃었다. 조선마저 일본에 빼앗길 수는 없었다. 조선이 아니라 청의 명운이 달린 일이었다. 창덕궁을 향하는 칼 끝이 날카로웠다.


12월 6일. 정강이 발표됐다. 청과 사대 관계를 끊자고 했고 잡혀간 대원군이 돌아오도록 하자 했다. 탐관을 처치하자고 했고 인민 평등을 말했다. 개혁안에 왕의 결재가 떨어졌고 조서가 내려왔다. 이제 남은 것은 정강을 공포하는 것뿐. 그때였다. 대포 소리가 울렸다. 궁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올 것이 왔다.


이틀 전 밤 연회에 참석한 이들이 느꼈던 황망함이, 이제는 옥균과 그 무리의 몫이 되었다. 청의 군사들이 궁을 둘러쌌고 그 큰 손아귀를 좁히기 시작했다. 창덕궁 안으로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저항하려 했으나 이쪽 편에 섰던 조선 군사들은 그 수에서 밀려버렸고, 일본 군사들은 싸우는 듯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옥균은 일본 공사와 함께 왕을 모시고 제물포(인천)로 가고자 했으나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조선땅에서 옥균과 그 무리의 자리는 사라져 버렸다. 반란을 도모했으니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남은 길은 한 갈래였다. 반역자가 된 이들은, 반역자들은 일본 공사와 함께 추격을 피해 인천으로 다급한 발걸음을 했다. 긴 길이었고 긴 날이었다. 위태로운 희망 위로 걷던 이들이, 불과 이틀 새 완전한 절망 위를 걷고 있었다. 조선을 위한 길이라 되뇌었으나 부질없는 읊조림이었다. 실패였다. 싹은 조급했고 뿌리는 얕았다. 하늘로도 뻗치지 못했고 땅으로도 내리지 못했다. 그 뿌리를 붙들었던 자들은 매몰찬 바람에 쫓겼고, 세상을 쥔 것 같았던 손바닥에 남은 것은 끊어진 뿌리일 뿐이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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