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땅

갑오, 1894 1부 끊어진 시위

by 서린

조선 반도의 남쪽. 소백산맥 서쪽으로 펼쳐진 땅이 너르다. 그 땅들은 위로는 하늘에 닿고 아래로는 바다와 산을 만난다. 하늘과 바다와 산이 보살피는 땅이니 그 품이 넉넉하다. 산에서 바다로 이어진 물줄기는 그대로 젖줄이 된다.


1893년. 한양에서 그 난리가 난 지 8년이 다 되어가는 시절. 봄이 되어 씨를 뿌리는 손은 바쁘나 마음은 푸석거린다. 괭이로 파는 것은 땅이고 깊어지는 것은 주름이다. 나무 그늘 아래 앉아 곰방대를 씹어 문 농부들 앞이 희뿌옇다. 망할 것 같은 세상이고 망해버렸으면 좋겠는 세상인데 어찌어찌 돌아가는 게 마뜩잖다.


실상 사람은 모두 땅에서 났으나 그 귀하고 천함에 구분이 있었다. 하늘에 가까운 이들이 있었고 그 아래가 있었으며 또 그 아래가 있었다. 곡식은 땅에서 났으나 쏟아져 내리기는 하늘부터였다. 하늘 가까운 곳에서 높게 앉은 이들이 입을 벌려 배를 채웠고 주머니를 벌려 곳간을 채웠다. 그러고도 넘친 곡식은 그 아래 앉은 자들의 배와 주머니를 채웠다. 또 넘친 곡식은 그 아래로 내려갔다. 땅에 가까운 이들은 까치발로 서서 한껏 벌렸지만 배는커녕 입도 채우지 못하여 기진한 이들이 넘쳐났다.


조선에서 난 쌀은 조선에 머물지를 못했다. 그 쌀들은 값을 비싸게 쳐주는 일본 상인들에게 넘어갔고,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후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돈을 삶아서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쌀이 부족하여 쌀값이 오르면 있는 자들은 돈으로 사서 먹었고, 없는 자들은 한숨으로 꾸어 먹어야 했으며 그마저도 안 되면 나무껍질을 벗겨야 했다. 그조차도 안 되어 화적 떼가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나마 몇몇 깨어 있는 자들이 방곡령을 내렸고, 나가는 쌀을 막아 백성들이 먹을 쌀을 지키려 했으나 바다를 건너온 탐욕을 막지는 못했다. 중간 상인들도 비싼 값을 쳐주는 이들의 유혹을 견뎌내지 못했다.


추수를 하였으나 농부들의 기쁨이 아니었으며 거두었으나 채우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먹고살자고 쌀을 꾸었으나 갚을 때가 되면 그렇게 살린 몸을 내어놓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 흉년은 흉년이었고 풍년도 흉년이었다. 뭇 백성은 목숨이 오갔고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 손으로는 재물과 자리가 오갔다.


위에 앉은 자들은 땅이 말라가는지도 몰랐고, 알아도 몰랐다. 마른땅이 갈라져 얼기설기 그물이 되어 주린 이들을 옥죄었다. 백성들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이리 움직여보고 저리 몸을 틀어보았으나 높은 이들과 그에 붙어먹는 자들은 그물 잡은 손을 단단히 하여 놓지 않았다. 그들이 먹은 것은 곡식이었으나 삼킨 것은 백성들의 어육(魚肉)이었다.


마른땅에서 나올 것은 싹이 아니라 한숨이었고, 갈라진 틈에서 나올 것은 곡식이 아니라 원성이었다.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밖에서 온 탐욕과 안에서 자란 탐욕은 마른땅을 더 쥐어짤 뿐이었다. 아래에서 거둘 것이 없는 낫은 결국 위에서 거둘 것을 찾기 시작했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3화빌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