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 1984 1부 끊어진 시위
1
역모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일본 공사관으로 몰려들었다. 성난 자들이 문을 젖히고 들어가 때리고 부수었고 불로 태워버렸다. 공사관 직원들이 죽었고 일본 거류민들도 목숨을 잃었다. 울분이었고 분노였다. 7년 전 일본은 군함을 강화도로 보냈고 포를 쏘아 겁박했다. 조선은 결국 문을 열었다. 그 문으로 일본이, 일본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조선에서 나는 것들을 일본으로 내어갔고 일본에서 나는 것들을 조선으로 들여왔다. 서로 주고받는 듯하였으나 조선의 살은 날이 갈수록 말랐고 일본의 살은 날을 거듭하여 불었다. 조선인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었고 일본인들이 앉은자리는 점점 늘었다.
개화는 도둑이었고 강도였다. 일본이 곧 개화였고 개화가 곧 일본이었다. 그런 일본을, 그런 개화를 보는 뭇사람들의 눈매는 날카로웠고 이는 갈려 있었다. 역모를 꾀한 자들이 일본을 등에 업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들고 일어섰다. 기름 위로 불씨가 날았다.
역모의 대가는 가혹했다. 홍영식은 뒤에 남아 왕을 모시다가 청 군사의 칼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조선에 남은 이들은 처형되었고 피살되었다. 대역죄인의 가족들은 자결하거나 투옥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네 사람은 다른 몇몇과 함께 인천을 통해 일본으로 도망쳤다.
조선은 일본에 김옥균을 내어놓으라 했다. 내정 간섭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일본은 거꾸로 공사관이 불타고 거류민들이 살해된 것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일본 공사가 연루된 사실은 애써 꺼내지 않았다. 조선은 그 요구를 당연히 거절하였다.
일본은 그 거절에 대한 답변으로 인천에 군함을 보냈고 한양에는 군사를 보냈다. 입에는 칼을 품었고 손에는 총을 들었다. 조선은 입에 품은 칼에는 응수할 수 있었으나 손에 든 총에는 대적할 수 없었다. 나라의 이름으로, 왕의 이름으로 사죄문을 써서 보내라 했고, 피해에 대해 배상금을 물라 했으며, 불에 탄 공사관을 책임지라 했다. 결국 사죄의 말이 담긴 국문이 사신을 따라 일본으로 갔고, 배상금을 물었으며, 공사관을 증축하는 비용을 내어주었다.
2
1885년 4월 18일. 청나라 톈진(天津).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마주 앉았다. 둘 사이에는 조선, 조선에 대한 이권, 두 나라의 위신이 놓여 있었다. 양국 군대 충돌에 대해 일본은 청의 책임을 물었고, 청은 일본의 책임을 물었다. 서로 이를 드러내었고 물러나지 않을 것처럼 노려보았으나 일이 더 커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청과 일본은 조선땅에서 철병하는 데에 동의하였다. 칼은 다시 칼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한 가지, 재파병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청은 조선은 속국이요, 때문에 조선에서 요청하면 언제든 파병할 수 있다 했다. 일본은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한 청과 일본 모두 재파병은 안 된다 했다. 청은 조선땅에서 우위를 지키자는 뜻이었고 일본은 청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자는 뜻이었다. 입으로는 조선을 위하는 것처럼 하였고 속으로는 각자의 잇속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으나, 짐짓 모른 척하며 조약을 맺었다. 양측 모두 조선에서 군대를 즉시 철수하기로 하였고, 조선에 군사고문을 보내지 않기로 하였으며, 조선에 출병을 해야 할 경우 서로 알리기로 하였다. 모든 조항에는 조선이 있었으나, 그 자리에 조선은 없었다.
한 발씩 물러섰으나 둘 사이에 놓인 조선이라는 고깃덩이에서 눈길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칼집을 내던져야 할 것이었다. 칼을 맞부딪고 서로 찔러야 할 것이었다. 그 생각은 감추어 두고 서로 꺼내지 않았으나 모두 그 속내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청과 일본의 욕망은 밭이 되었고, 개화된 조선을 꿈꾸던 자들의 욕망은 씨앗이 되었다. 밭은 그 씨앗을 키우지 않고 삼켜버렸다. 마땅히 땅 위로 자라야 할 것은 죽어버렸고, 땅 밑에서는 다른 무언가가 잉태되어 자라기 시작했다. 그 무언가가 자라고 자라서 땅 밖으로 드러나는 날 누군가에게는 희망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절망일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종말일 것이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명확해 보였다. 희망은 조선 쪽에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