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한 발아

갑오, 1894 1부 끊어진 시위

by 서린

1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정을 숨기려 애를 쓸 수는 있다. 하지만 누를 수는 없다. 부풀어 오른 감정을 숨기려 애를 쓸 수는 있다. 하지만 숨길 수는 없다. 옥균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이 흔들리자 눈빛이 흔들렸고, 눈빛이 흔들리자 몸도 그에 맞춰 흔들렸다. 마실 것은 널렸으나 침이 말랐고 먹을 것도 널렸으나 속이 허했다. 연회장에 모인 이들의 말소리는 겉돌았으나 바깥의 움직임은 귀에서 맴돌았다. 밖은 아직 고요했다.


무언가 잘못됐다.


옥균을 채운 것은 불안이었고 자리에서 일으킨 것은 초조였다. 저 바깥에서 터져야 했을 폭탄이, 거사를 치루라는 그 신호탄이, 때를 넘기도록 소식이 없었다. 연회장 바깥으로 나갔다 들어오기를 몇 차례. 옥균의 감정은 이미 누를 수도 숨길 수도 없는 크기로 자라 있었다. 그런 김옥균을 민영익의 눈이 쫓고 있었다.


무언가 수상하다.


갑오년으로부터 약 10년 전. 1884년 12월 4일 밤. 우정국 개국 연회장. 연회와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이 여기저기서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연회석에 앉은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네 사람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를 누르고 숨기려 애썼다.


불이야!


갑작스러운 외침에 제각기 놀던 감정들이 하나로 묶였다. 당황이었다. 각자 자리에서 따로 흐르던 눈길이, 외침이 들어온 한 곳으로 쏠렸다. 그곳으로 민영익이 뛰쳐나갔다.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아직 당혹스러운 마음에 어찌해야 할까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 당혹감이 공포로 바뀌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뛰쳐나갔던 민영익이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그러고 나서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칼을 맞은 몸이었고 피를 덮은 얼굴이었다. 비명과 고함이 얽히고설켰다. 이제 그 자리에 더 있을 이유는 사라졌다. 그 광경을 본 모든 이들이 흩어졌다. 그들을 이끄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이었고, 머리가 아니라 발이었다. 죽어가는 민영익은 묄렌도르프가 부축하여 자리를 떴다. 연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2

모두 각기 목숨을 구할 곳으로 뛰는 동안 옥균은 일행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급히 향했다. 옥균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에게 물었다. 약속한 대로 이행할 것인지. 그렇다는 답을 얻은 옥균은 창덕궁으로 몰아쳤다. 왕이 그곳에 있었다. 옥균의 목숨이 거기에 달려 있었다. 평소 다니던 길목이었으나 그날 밤은 그 사이가 유난히 길었다. 일행은 입궐하여 왕의 처소로 향했다. 궁궐 여기저기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미리 심어놓은 자들이 화약을 터뜨리고 있었다.


청국 군대가 쳐들어 왔으니 속히 피하셔야 합니다.

일본 공사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친서를 써주시면 전달되도록 하겠습니다.


옥균은 초조했다. 왕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의심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표정과 말로 은근히 눌렀다. 결국 왕에게 친서를 받았고 거처는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옮겨 갔다. 경우궁은 좁았다. 적은 수로도 둘러쌀 수 있을 만큼. 왕과 왕비를 놓치지 않을 만큼. 옥균이 부른 병사들과 일본의 병사들이 경우궁을 에워쌌다. 왕을 보호하자는 명목이었으나 자신들의 목숨줄도 걸려 있음을 알았다. 옥균의 손아귀가 오므라들었다.


경우궁은 덫이 되었다. 옥균과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을 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였다. 깊은 밤 당혹스러운 부름에 대신들이 하나둘 입궐하였고, 들어서는 자들은 모두 몸으로 칼이나 몽둥이를 받았다.


죽이지 말라!


왕이 노하여 외쳤으나 듣지 않았다. 옥균은 사람을 시켜 치고 찌르게 하였으며 그렇게 죽은 대신이 예닐곱이었다. 옥균에게는 왕의 분노와 모욕이 들리지 않았고 왕의 눈과 목에 선 핏발이 보이지 않았다. 옥균은 새 세상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열어젖힐 새로운 세상. 동이 터오기 전에 새날을 시작할 준비를 마쳐야 했다.


옥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마음들은 크게 앞섰으나 몸들이 따르지 못했고, 조급했으나 때가 따르지 못했다. 높은 하늘만 보며 싹을 급하게 내느라 쌓인 눈을, 척박한 땅을,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한밤 중임을, 옥균은 미처 알지 못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