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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Aug 23. 2023

안 바쁜 사람 중에 바쁜 사람

어릴 적 아빠가 카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마는 밥상에 카레 같은 건 올리지 않으셨다. 엄마가 차려내는 밥상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빠의 입맛을 저격하셨다. 아빠가 좋아하는 고기나 생선은 빠지지 않고 밥상에 올라왔고, 둘 다 올라올 때도 있었다. 덕분에 아빠는 회식이 있는 날도 집에 와서 꼭 엄마의 밥상을 마주하고 잠이 드셨다.


중학교 급식 메뉴에서 처음 마주한 카레는 입덧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헛구역질이 올라오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내내 살았지만 외국에서 향신료 강한 메뉴를 처음 접하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카레 다음으로 충격적인 메뉴는 비지찌개였다. 두부가 들어간 찌개는 많이 보았지만 국그릇에 담긴 비지의 모습을 보니 토사물이 잠시 떠올랐다. 물론 지금은 주는 대로 다 먹고, 없어서 못 먹는 음식들이다.


다행히 우리 아이들은 카레를 싫어하지 않는다. 특히 돈가스를 카레에 찍어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카레가 돈가스 소스처럼 건더기가 풍부하지 않고 묽은 것처럼 보이며 색깔은 황토색이나 갈색을 띠어야 한다. 하지만 엄마들이 카레를 하는 이유는 한 그릇 음식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갖은 야채를 포함해 골고루 먹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을 것이다.


양파, 당근, 감자, 호박, 고기 등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맛나게 끓이면 첫째 아이의 숟가락질이 시원치 않다. 아삭한 식감의 양파부터 주황색 당근, 연두색 호박 모두 아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두 살 아래의 둘째 아이는 식사시간마저도 누나의 말로 고스란히 영향을 받고 있어 웃프다. 덕분에 모든 재료를 잘게 자르고 보이지 않을 만큼 오래 끓여서 수프처럼 녹여내는 게 일이 되었다.


양육자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의 끼니는 굶기지 말아야 하는 법이기에 어떻게는 한 끼를 차려내고 식사 후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주문한다. 다 먹은 식기를 싱크대에 넣기, 샤워 후 빨래를 바구니에 넣기, 가방 및 놀잇감 정리 같은 일이다. 아이들의 나이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만 주문하는데도 귀찮아서 대신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에는 그저 응원과 격려를 하며 다시 권유한다. 물고기를 대신 잡아주지 않고, 잡는 법을 알려주는 나만의 방식이다.




20년 전에도 이미 PC보급이 활성화되면서 온라인 시대는 펼쳐졌다. 나는 당시에도 가족의 모든 주민번호를 외우며 온라인에서 필요한 일들을 대신 수행하고 있었다. 온라인 쇼핑부터 서류발급에 필요한 일까지 비공식 민원창구였다. 10년이 흐르자 컴퓨터가 아닌 더 작은 스마트폰에서 하루 종일 온라인 세상이 한 몸처럼 옆에 붙어 다니는데도 매일 얼굴을 보는 딸이 있기에 부모님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엄마는 스물여섯에 결혼하는 딸이 일찍 결혼하는 것 같다며 아쉬워하셨다. 아빠도 비슷했는데 20년 넘게 키워온 자식이라 그럴 수 있겠다고 느낄 뿐이었다. 딸이 결혼준비를 하자 엄마도 나름 딸을 떠나보낼 준비를 했다. 그동안 고지서가 오면 온라인뱅킹을 도와드렸기 때문에 관리비와 각종 지방세를 잊지 않게 위택스에 접속해서 엄마의 계좌로 자동이체를 등록해 두었다.


결혼을 하며 새로운 가정을 꾸렸지만 어쩌다 보니 친정과 가까운 곳에 신혼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엄마는 이럴 줄 알았다면 자동이체 등록을 안 해도 되었을 거라면서 각종 고지서가 나올 때마다 우리 집에 안부를 물으며 들고 오셨다. 매년 돌아오는 연말정산 시기에도 회사에서 나오는 안내서류를 챙겨 와서 보여주셨다. 물론 항상 빈손으로 오지 않고 엄마의 정성이 깃든 반찬을 한 아름 가지고 찾아와 주신다.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알지만 스마트폰은 전화, 문자, 카톡만 사용하는 아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온라인뱅킹을 사용하지 않는 아빠는 급하게 계좌이체가 필요할 때 근처의 ATM을 찾기보다는 딸에게 카톡 한 번이면 더 빠르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덕분에 아빠에게 오는 모바일 청첩장과 부고장도 가끔 전달받는다. 사기를 당하면 당했지 남의 돈 떼먹을 분들은 절대 아니기에 딸에게 이체를 부탁한 금액도 수일 안에 입금해 주신다.


가끔 고마움의 표시로 지인으로부터 받은 모바일 영화관람권을 전달해 주시는 데 사용해 보신 적이 없으니 바코드를 빼고 보내주신다. 바코드를 달라고 하기에는 직접 가야 하거나 와서 보여주실 것만 같았다. 휴대폰을 교체할 일이 있을 때에도 신뢰의 아이콘인 비공식 민원창구에게 휴대폰과 신분증을 맡기며 대신 기기변경을 부탁하신다. 그밖에 이사계획이 있어 집을 알아보고 싶거나 자동차가 연식이 오래되어 신규 구매계획이 있을 때에도 내 카톡은 알림이 울린다.




얼마 전 이직을 하신 아빠는 4대 보험 가입내역 확인서가 필요하다며 본인의 공인인증서를 가지고 있는지 딸에게 물으셨다. 수년간 매년 5월 홈택스에서 종합소득세를 대신 신고해 드렸으니 그때 필요한 공인인증서를 물으신 듯했다. 인증서는 만료가 되었고, 개인 비회원 로그인은 인증서가 필요 없다는 의견에도 타인이 말해준 공인인증서만 고집하셨다. 네이버나 카카오톡 등 간편 인증도 가능하다는 말에 직접 사이트를 들어가 보는 시도는 없으셨다.


돌아오는 답변은 한 문장이었다. "우짜든 큰딸이 해 주소" 집에서 육아를 주로 하는 사람은 바쁜 일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곧 휴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유치원에 나가야 하는 시각이라 어렵다고 하자 서류의 준비기간은 일주일이니 오늘이 아니어도 기간은 충분하다고 하셨다. 결국 본질을 말씀드렸다. "간편 인증에도 본인 휴대폰으로 인증을 해야 해서 제가 대신할 수도 없어요."


이어서 본인 휴대폰을 가지고 아빠의 근로시간이 아닌 가능한 시간 언제든 딸의 집으로 방문하려고 하시자 오프라인 경로를 최종 안내해 드렸다. "4대 보험 가입 확인서는 국민연금공단, 건강보험공단, 근로복지공단 가까운 어디를 가도 민원실에서 발급할 수 있어요." 이렇게 마무리가 될 줄 알았던 서류 한 장은 끝이 아니었다.


저녁이 되니 아빠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던 엄마는 딸에게 전화해서 바쁜지부터 물어보셨다. 첫째와 둘째의 감기가 한차례 가고, 막내가 당첨되었는지 발열 증상이 있어서 해열제를 먹이고 멍하니 경과를 지켜보고 있던 차라 바쁘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타이밍이라고 생각된 엄마는 아빠의 휴대폰을 들고 지금 방문해도 되는지 물으셔서 아이의 건강상태를 알리고 통화를 종료했다.


세상에 안 바쁜 사람은 없으니까 나라도 바쁜 척하며 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바쁜척하지 않고, 아이들에게는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시도해 보자고 제안하며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데 오히려 시도해 보실 엄두가 안나는 부모님은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나는 안 바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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