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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Sep 13. 2023

나는야 착각쟁이

데자뷔

8년 전 첫째 아이를 출산하던 날이었다. 성격 급한 엄마는 예정일에 맞춰 유도분만을 잡아두었고, 엄마 배속이 더 좋았던 아기는 아직 나올 생각이 없었다. 촉진제가 투여되는 동안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맛보며 이게 바로 내가 초래한 결과라고 허공에서 말해주는 듯싶었다. 셀 수 없는 내진이 계속되고 결국은 제 발로 피 흘리며 걸어가 수술대 위에서 일련의 분만과정을 마쳤다.


친정엄마도 두 번의 자연분만을 경험하셨고, 주변의 친구들은 아직 모두 미혼이었으며 20대 임부는 당연히 자연분만을 해낼 거라고 생각했는지 제왕절개에 대해서는 입원기간이 길다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알아두지 않았다. 몸에서 3.14 kg의 아기가 빠져나오면서 정신도 반쯤 빠져나간 상태로 입원실에 옮겨졌다. 그리고 배 위에는 핫팩이 올려졌으며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누워서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기 위해서 가까운 가족들이 도착했다. 친정아빠는 딸의 힘겨운 과정이 안타까우셨는지 눈물을 비치셨고, 미역을 한 아름 준비해 놓으셨다는 친정엄마는 걱정 말라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도착해서 꼬물거리는 아기의 모습을 보고 축하한다는 말씀을 전해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며느리의 출산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고팠을 아들과 식사를 하러 집으로 향하셨다.


한 시간 거리의 타 지역에서 오신 어머니는 집에서 식사를 하시고 주무시고 가실듯했다. 그래서 어차피 밤이니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온다는 배우자에게 오히려 혼자 있는 게 편하겠다 싶어 그러라고 답변했다. 모두를 보내고 다인실 침대에 혼자 누워있던 밤 평온하게 휴식을 취할 거라는 상상은 깨져버렸다. 하반신 마취가 풀리면서 시작되는 통증, 조금도 옆으로 움직일 수 없는 자세,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어 바짝 말라버린 입술.


한 시간 만에 모든 것이 달라져있었다. 가족들과 집에 가서 편하게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온다던 배우자도, 아무것도 몰라서 별일 없겠지 싶어 보내버렸던 나도 모두 원망스러웠다. 어려운 과업을 마친 사람은 나였는데 축제는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것만 같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눈물만 흘리고 있을 때 옆 베드의 보호자분은 내 사막 같은 입술을 발견하시고는 물수건으로 적셔주며 간간이 고생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생일날이었다. 필요한 것은 스스로 구입하는 편이라 생일날 먹고 싶은 케이크도 셀프예약 후 픽업해 왔다. 배우자는 생일선물로 가방을 알아보다가 가방에 별 관심이 없는 아내에게는 무용지물이라고 느꼈는지 립밤으로 변경하는 것을 딸아이가 알려주었다. 아들은 본인이 좋아하는 초코칩쿠키를 엄마와 함께 먹으려고 준비했고, 딸은 엄마가 잘 사용할 것 같은 점착 메모지와 편지를 준비했다. 공식적으로 이 모든 것은 비밀이었다.


지인에게 꽃도 선물 받아서 꽃과 케이크가 있는 평범하지만 바라던 생일날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생일날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하루 전날 배우자가 제안했다. 그리고 반의 반차라는 '반반차' 제도가 새로 생겨 두 시간 일찍 퇴근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인 배우자는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다고 해주어 모두가 내 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후 4시 무렵 퇴근했다는 연락을 해온 배우자는 어머니가 지방검찰청 앞에 있으니 모시고 함께 들어오겠다고 알려주었다. 사연인 즉 어느 정치인을 지지하는 어머님은 그 정치인이 검찰조사를 위해 출두하자 그 지검 앞에 응원을 위해 가 계셨던 것이다. 아들과 같은 지역에 계셨던 어머니는 본인을 데리러 온 아들과 함께 같이 저녁 식사를 하러 집에 도착하셨다.


전날 미리 아이들과 상의해 두었던 메뉴인 치킨과 피자를 배달시켜서 맛있게 먹고, 평일이었기에 아이들은 평소처럼 저녁 루틴대로 각자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루종일 밖에 계셨을 어머니는 식사를 마치자 식곤증으로 자꾸만 눈이 감기셨고, 배우자는 방에서 좀 누우시라고 말씀드리자 살짝 어리둥절했다. '지금 주무시면 어떻게 되는 거지?'


배우자가 안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바로 따라 들어가서 물었다.

"오늘 어머니 주무시고 가셔?"

"응."

"왜 말 안 했어?"

"내가 말 안 했나?"

"응!"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이 답변했다.

"새벽부터 나오셔서 검찰청 앞에 계셨는데 지금 얼마나 피곤하시겠어."


어머니가 당연히 주무시고 가실 수도 있지만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평소 카페에서 '마스카포테 티라미수'를 '미스카포네 티라미수'라고 발음하고, '1만 원 결제 시 주차 1시간 무료'라는 답변을 '1시간 결제 시 1시간 무료'라고 알아듣는 배우자라도 웃으며 지적하지 않고 넘겼다. 이번에도 나는 입술을 옆으로 쭈욱 늘려 복화술로 마무리지었다. "다으메는꺼억얘기해져여"


다음날 아침은 아이의 휴대폰 알람으로 시작되었고, 오랜만에 가스레인지 3구는 풀가동 되었다. 미역국을 데우고, 매콤한 김치찌개와 맵지 않은 차돌박이 된장찌개를 동시에 끓였다. 나물은 특히 쥐약이고, 반찬을 자주 하지 않아서 평소에도 일품요리로 승부 보는 나는 미역국, 김치찌개, 된장찌개 한 그릇씩 차려놓고 골라먹으라고 제안했다. 반찬은 친정에서 공수한 배추김치와 파김치가 전부였다.


출근길에 역으로 모셔다 드린다는 배우자는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고, 아이는 등교했다. 생일이 끝났다.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친숙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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