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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Sep 21. 2023

10년 차 부부의 결혼기념일

어제는 늦게 퇴근한 배우자가 다음날 계획을 당당하게 알려왔다. 평소보다 2시간 일찍 퇴근해서 저녁을 같이 먹겠다고 맛집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알림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배우자는 첫째 아이에게 내일이 엄마와 아빠의 결혼기념일이니 외식을 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놀라지 않고 원래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긍정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다음날 외식계획에 이미 흥분모드로 접어든 첫째 아이는 누구보다 메뉴 선정에 진심이었다. 아빠의 스마트폰에 거의 빠져들 기세로 자세를 취한 아이는 예상대로 후보에 오른 대부분의 식당이 거론될 때마다 환호했다. 갈빗집, 고깃집, 퓨전식당, 양식당 중에서 가기로 결정된 식당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양식을 하는 한옥집이었다. 먹는 것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서 최종 확인한 것은 아이와 동반할 수 있는 식당인지 여부였다.


결혼기념일 당일 아침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배우자는 간단히 식사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을 했고, 아이는 두둑이 아침을 먹고 싱그럽게 등교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했던 말이 있다. "여보 결혼기념일 축하해." " 엄마 결혼기념일 축하해." 고맙다고 대답했지만 3초 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결혼을 나 혼자 한건 아니겠지.'


4시에 퇴근한 배우자는 나와 아이들을 만나서 6시 즈음 우리는 식당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식당은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공간에 조용한 분위기였다. 크지 않았던 아이들의 말소리도 잔잔한 배경음악보다 집중되던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빠르게 메뉴를 주문하는 것이었다. 로제파스타와 까르보나라, 페퍼로니 피자와 처음 도전해 보는 라자냐까지 다행히도 모두 성공적이었다.



사람이 많은 식당에 아이들과 동반하면 혹시 피해를 줄까 염려되어 나도 모르게 긴장상태를 유지하곤 했는데 이날은 날씨의 영향으로 테이블이 넓은 2층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왔다. 막내까지 확신할 순 없지만 우리 부부는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혼기념일 행사를 마친 배우자는 유튜브 뮤직으로 옛날 발라드를 재생시켜 꽤 오랜 시간 추억에 잠겨있었다.


그중에서는 이적의 <다행이다>라는 곡이 갑자기 다른 가사로 들리기도 했다.


그대를 만나고

파뿌리 머리색을 만질 수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머금고 있던 물을 뿜을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추운 겨울 난방 아낄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미온수의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장기 출장 속에도 짧은 입원 속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정신승리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그대 곁을 지켜주던

우리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라는 거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나눠먹을 밥을 시킬 수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눈이 되어 운전할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필요 없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빙구미가

여기 있어줘서..




2014년 9월 20일에는 눈부셨다.

오늘은 비가 왔다.

함께한 모든 시간이 좋았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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