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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Sep 30. 2023

추석에도 라면이지

기억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명절은 낯선 이로부터 쏟아지는 안타까움의 연속이었다. 명절이라는 이유로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은 옆집에 사는 이웃보다 드물게 만나므로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서로가 같은 조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확률이 99%인 낯선 이다.


중고등학생 때는 일 년에 네 번 있는 중간, 기말고사를 대비한다는 그럴듯한 핑계가 방어막이 되어주었고, 사회에 발을 내디딘 성인이 되어서는 국내외로 여행을 떠나며 엄마의 주방일을 전혀 돕지 않는 불효녀를 자처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서 친정과 시댁을 대처하는 나의 자세는 어차피 먹을 끼니이니 밥 한 끼 맛있게 먹고 오는 것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추석 전날 먼저 약속이 잡힌 친정에 방문해서 맛있게 점심을 먹고, 동네 산책도 하며 반나절을 보내다가 평화롭게 복귀했다. 다음날 외식을 하기로 약속된 시댁에서는 만나기로 한 식당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함께 등장했다. 시댁에서 일찍 복귀한 시누이였다.


명절에 자녀를 따로 보지 않고 한꺼번에 보면 좋으셨을 어머니는 더없이 기뻐하셨고, 계획형 성격에 속하는 며느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전개에 내심 당황하지만 딸과 함께 식사메뉴인 돼지갈비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와 아이들은 돼지갈비를 배불리 먹고 식사를 마무리하였으나 그 순간 물냉면 세 그릇의 추가 주문이 들어갔다.


식사를 어느 정도 마치고 고개를 들자 물냉면이 나오기까지의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을 향한 시누이의 안타까움이 시작되었다. 염색을 하지 않아 흰머리가 눈에 띄도록 가득해진 나와 벌써 안경을 착용하기 시작한 첫째 아이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셨다. 이어서 어느 때보다 배불리 먹었음에도 거의 뼈만 보이도록 마른 둘째 아이와 돼지갈비 식당에 와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막내 아이를 안타까워했다.


안타까운 우리의 여러 모습을 말하던 시누이는 거의 보이지 않는 눈망울과 동그래지는 입술을 통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막내 아이는 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였으며 둘째 아이는 아빠를 그대로 닮은 체질이고, 여러 노력 끝에 교정시력 1.0을 만들어낸 첫째 아이는 지금까지 안경 덕분에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어 감사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두피건강을 위해 염색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세 아이가 모두 미취학 시절인 2년 전만 해도 결혼식이나 돌잔치에 가면 행사와 함께 제공되는 뷔페식 식사를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메뉴를 둘러보며 한 명씩 제공해 주고 나서야 줄이 없는 메뉴를 담아 빠르게 자리로 돌아와서 허기를 채우는 것이 전부였다. 음료와 디저트까지 한번 더 아이들을 챙겨주고 나면 먹은 것도 별로 없이 배부른 느낌이라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식사를 마친 아이들은 대부분 낮잠에 빠져들었고, 그 조용한 순간을 틈타 답례품으로 받아온 떡이나 호두과자를 먹으며 2차로 진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번 추석에는 분명히 배가 부른 느낌이라 냉면이나 된장찌개를 추가 주문하지 않았는데 집에 도착해서 아끼던 마지막 남은 두부김치 신라면 한 봉지를 뜯었다.

안타까움으로 허기를 채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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