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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Oct 18. 2023

게임이 노잼인 나이

곧 불혹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농담처럼 늘어지고만 싶던 주말, 배우자는 선크림을 사야 한다는 핑계로 올리브영에 가자며 외출을 제안했다. 이불을 꼭 쥐고 있었지만 1초 만에 긍정적인 답변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좋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 진심이긴 하다.


감지 않은 머리를 질끈 묶고 따라나섰지만 대답과는 달리 연신 하품만 해대는 나에게 그는 변한 것 같다고 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결혼 전에는 주말 이른 아침부터 약속을 잡아 그의 집 앞까지 친히 데리러 갔었으니 지금은 이른 아침에 눈도 잘 떠지지 않는 모습에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평소 선택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일부러 품목이 한두 개씩만 진열된 창고형 대형마트를 선호하는 나에게 올리브영은 우주에 떠있는 별과 같았다. 몇 가지 제품을 발라보는 배우자에게 다 괜찮은 것 같다고 말해주며 대충 선크림을 구입하고 나오니 이번에는 공유자전거를 대여해서 호수가 있는 공원을 가자고 했다.


머리에서 고민할 겨를 없이 입에서는 이미 좋다는 대답이 나와버렸다. 스마트폰에 공유자전거 앱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자주 이용하지 않아서 굳이 깔고 싶지 않았지만 이름과 휴대폰 인증만 하면 된다고 친절히 알려주어 순식간에 대여했다. 그리고 전동자전거는 운동이 안되니 꼭 일반자전거를 대여하라고 덧붙였다.


스무 살 이후로 자전거 탈 일이 없었고, 두 발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들만 뒤에서 밀어주다가 근 20년 만에 자전거를 타려니 그저 웃음이 났다. 낯선 환경에 놓일 때면 자꾸만 빙구 같은 미소가 실실 새어 나오는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다가 인적이 드문 공원으로 접어드니 겨우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며 가을을 즐겼다.



몸에서 카페인을 어서 넣어달라고 요청이 들어오던 찰나 카페를 가자는 제안에 또 진심으로 좋다고 응답했다. 공원 벤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도 하품을 연신 해대는 나에게 또 변했다고 하길래 이번에는 맞받아쳤다.


"아니 주말이면 게임만 하던 사람이 요즘엔 어떻게 자꾸만 나가는 거야? 그게 더 신기하네?"

머쓱해하며 입을 연 그의 대답은 놀라웠다.

"게임이 이제 별로 재미가 없어..."


사실 말은 안 했지만 저 인간이 게임 개발자도 아니면서 저러다 뭐가 되려나 싶기도 하고, 한참 컴퓨터를 내다 버리고 싶었을 당시에는 이런 때가 오리라고 상상도 못 했었다. 백종원 선생님도 아직까지 게임을 즐겨하신다던데 저러다 환갑 때도 루테인을 챙겨줘야 하나 싶어 앞날이 살짝 두려웠었다.


그의 나이 해가 바뀌면 곧 마흔. 어느 순간 게임을 해도 아픈데 없이 건강하면 된 거라고 생각하며 컴퓨터 앞에 피시방처럼 간식까지 나르게 되었다. 스트레스 해소가 되면서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니 그도 즐길 만큼 즐겨서인지 재미가 없기도 하는 날이 와버렸다.




그는 5년 전 홀로 떠난 유럽 출장을 떠올리며 와이파이 환경이 한국과 다르게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게임을 하지 못하고 강가 주변을 산책했던 때를 말해주었다. 그때 웅장한 성이 강가에 그대로 비친 모습을 보며 주변을 산책하는 게 행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것을 잊지 못한 그는 호수에 반대편 아파트가 비치는 모습이 유럽의 강가를 보는 것 같다며 풍경 사진을 열심히 촬영했다. 게임이 지루해진 그가 리버뷰와 파크뷰에 관심을 보이며 햇볕 쬐고 산책하는 게 행복이 될 수 있다고 말하여 잊지 못할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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