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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Nov 05. 2023

어른도 애플데이가 필요해

초등학생인 첫째 아이가 1학년 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학교에서 진행해 주신 입학 100일 행사와 학급에서 진행했던 마니토 미션이었다. 올해는 전교생이 익명으로 누군가에게 전달될지 모르는 편지를 각자 써서 얼마 후에 전달되는 행사를 마쳤다. 이름하여 애플데이.


아이는 애플데이가 미안하거나 고마움 또는 사랑의 표현을 담은 편지를 전달하는 날이었다고 알려주었다. 일주일 전 공식적으로 누군가에게 편지 쓰는 날이 있었고, 아이는 다음의 내용을 담아 제출했다고 전해주었다.


누군지 모르는 OO에게.
이 편지를 받게 되는 너는 어떤 일이든 용감하게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중략)
사랑해요.


어떤 학년에게 전달될지 모르기에 편지의 문장은 존댓말로 쓰는 것이 좋겠다는 안내를 받았고, 이후에 모아진 편지들은 복지실 선생님의 검수 후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 아이가 받은 편지를 자랑스럽게 보여준 덕분에 따뜻한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친구에게.
친구야, 만약 공부가 힘들다면 괜찮아.
너는 꼭 해낼 거야.
사람은 어려움을 겪는 법이야.
급식 잘 먹고 어려움을 극복해.
요즘 날씨 춥지?
따뜻한 물 마시고 옷 잘 입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해.
친구도 많이 사귀고. 그럼 안녕.
- 아무도 모르는 친구가.


사람이 힘들 때는 우선 잘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린이였다. 요즈음 혹은 앞으로 아이에게 기분 좋게 해야 할 잔소리들이 핵심만 쏙쏙 담겨있어서 늬 집 어린이인지 실명을 알게 된다면 편의점 쿠폰이라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친구는 30대 아줌마도 눈물이 고였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기념일은 다양하다. 국제적 기념일과 국가공인 지정 공휴일은 물론 상업적인 목적에서 만들어진 기념일도 있다.


- 1월 : 14일(다이어리데이)

- 2월 : 14일(밸런타인데이)

- 3월 : 8일(여성의 날), 14일(화이트데이)

- 4월 : 1일(만우절), 5일(식목일), 14일(블랙데이)

- 5월 : 1일(근로자의 날), 5일(어린이날), 8일(어버이날), 15일(스승의 날)

- 6월 : 5일(환경의 날), 6일(현충일)

- 7월 : 17일(제헌절), 각종복날

- 8월 : 15일(광복절)

- 9월 : 17일(고백데이)

- 10월 : 31일(핼러윈데이)

- 11월 : 11일(빼빼로데이)

- 12월 : 25일(크리스마스)


헤아릴 수 없는 각종 데이를 다 알 수도 없지만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기념일을 나열해 보았다. 기념비적인 날을 국가가 기념하는 날도 있고, 각종 단체에서 지정되거나 누군가에게 감사의 의미를 표현하는 날들이었다.


어릴 때는 항상 얼굴 보며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는 부모님께 가정의 달 5월에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녀의 의, 식, 주 모든 것을 책임지느라 얼마나 어깨가 무거우셨을까 이제야 조금씩 문득 떠오른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보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에게도 참으로 많이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회사에서는 하나라도 더 알려주시려던 부장님, 퇴근길 전철을 기다리다 철로에 휴대폰을 떨어뜨렸는데 직접 내려가서 도움 주신 군인분,  만삭에 둘째를 안고 첫째가 타고 있는 유모차를 밀고 있을 때 집 앞까지 유모차를 대신 끌어주신 분, 마트를 다녀오시다가 아이들과 마주치고는 딸기를 세 팩이나 건네주신 부동산 사장님, 현관문만 열면 공용복도에 우사인볼트처럼 튀어나가는 아이들이어도 언제나 괜찮다고 말해주시는 이웃분.


정말이지 현존하는 기념일만큼이나 셀 수 없이 감사한 일들이 많았다. 요즘도 아이들과 어떤 가게에 들어가는 순간 에티켓에 대한 주의를 주느라 '죄송합니다'에서 시작한 인사말이 나올 때는 '감사합니다'로 바뀌곤 한다.


마음속에 담아둔 감사함이 오래 쌓여버리면 잊힐 수도 있기에 가능한 시간만 되면 나만의 방식으로 충동적인 표현을 한다. 더운 여름날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면서 편의점에 들른 김에 이온음료를 사들고 경비실에 전달, 카페에서 커피를 사는 김에 몇 잔을 더 구입해서 위층 학원 문 앞에 라이더처럼 전달, 명절이라는 구실로 인사하는 척 과일이나 간식거리를 옆집과 아랫집 문고리에 걸어둠.


아이가 성장하면서 배워야 할 것 중에 가장 큰 것을 배우고 있는 것 같다. 미안한 상황에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알고, 고마우면 감사하다고 표현할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랐다. 그리고 나야말로 애플데이가 필요했던 사람이다. 고마운 분들에게, 미안한 그 사람에게, 사랑하지만 투덜댔던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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