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쥐방울 Nov 29. 2023

별일 없는 하루가 귀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정을 마치고 평온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게 될 저녁을 맞이했다. 무얼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대충 배는 채웠고, 이제 씻는 것을 시작으로 저녁 루틴을 수행하며 어서 소등할 시간이 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문고리 사건이 발생했다.


욕실로 들어간 첫째 아이가 문을 완전히 닫지 않은 채 씻으러 들어갔는데 문을 열고 닫는데 재미를 붙인 막내가 나타나서 철컥 문을 닫아버렸다. 혼자 샤워를 하다가 긴 머리를 감고 헹굴 때 보통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가 다시 문을 살짝 열어두려고 하니 문이 열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작 문을 닫아버린 막내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다행히 문고리에는 손잡이 옆에 구멍이 있어서 이쑤시개나 젓가락으로 콕 찌르면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점점 마음은 급해지고 안에 혼자 있는 아이가 걱정되어 괜히 재촉하기만 했다. 안에서 손잡이 옆에 있는 잠금 버튼을 누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었다. 호흡조절에 실패한 채 혹시 내가 모르는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닐까 초록창에 계속 검색해 보았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성을 제대로 되찾지 못한 사람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계속했다.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배우자에게 전화해서 급한 상황을 전달하고 언제 퇴근할 수 있는지 물은 것이다. 돌아오는 답변은 당장 출발해도 한 시간은 걸릴 것이라며 본인은 도움이 되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이런 일로 119를 부를 수 없다는 생각만 가득 차 있을 때, 그래도 상황과 멀리 떨어져 있는 배우자가 이성적으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연락하여 도움을 요청해 주었다. 다행히도 5분 안에 와주신 당직 직원분께서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여 얇은 플라스틱을 문 사이의 틈으로 집어넣어 강제로 문을 여는데 성공하였다.



사건의 원인은 고장. 막내는 미안해서 울고, 샤워도 하지 못한 채 겨우 탈출한 첫째 아이는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나와서 옷을 다시 입으며 마음을 추슬렀다. 추후 재발 방지를 위해 직원분께서 친절히 문고리를 분해해 주셨고, 이로써 문고리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후 우리는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바로 이불행을 택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차를 회사에 두고 대중교통으로 귀가를 한 배우자가 현관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에 잠시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얼마 전 오늘 회식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해준 것이 생각났다. 평소 회식을 해도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아 귀가가 늦는 점 빼고는 별로 큰 이벤트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만은 달랐다. 늦게까지 깨어있던 막내와 겨우 눈인사를 하고는 안방에 들어와서 외투를 벗고 욕실 바로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는 '아이고'와 '여보'를 번갈아 말하면서 따로 특별히 의미 없는 추임새만 해대며 현재 과음으로 힘든 본인의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몇 초 후, 그는 미래를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바로 욕실 문을 열고 변기로 향했다. 아직 간에서 채 분해되지 않은 알코올과 함께 섭취되었을 여러 안주들을 한꺼번에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5분 후 일이 마무리되어 욕실에서 기어 나온 그는 차마 침대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


어찌 된 일인지 묻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는 기어이 나에게 3병이라는 단어를 들려주었다. 가만히 듣고선 베개와 이불을 바닥으로 던져주었다. 그래도 집에서 자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평소와 달리 바닥 난방 온도를 올려주는 것으로 내 역할을 다했다.


새벽에도 한차례 욕실로 가서 게워낸 그는 아침에 일어나지도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두통에 시달렸다. 첫째 아이가 먼저 등교를 하고서야 겨우 팀장에게 반차를 쓰겠다고 카톡을 겨우 남긴 뒤 다시 잠들었다. 전날 술 마시고 다음날 지각 혹은 결근하는 사람의 태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게 배우자였다니 놀라웠다.


아빠가 회사에 출근하지 않자 둘째 아이는 본인도 유치원을 쉬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둘째 아이와 숙취에 시달리는 배우자의 약을 사러 외출했지만 하필이면 약국은 휴무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 가보았더니 엄청나게 다양한 숙취해소제에 없는 선택장애까지 생기려던 참이었다.


그나마 선택지가 좁은 액상 숙취해소제를 보러 냉장고 앞으로 가보니 20대 초반에 제법 마셔보았던 제품이 눈에 띄었다. 반가움에 더 볼 것도 없이 한 손에 딱 들어오는 캔 하나를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숙취는 여전하지만 바쁜 업무로 계속 오는 연락 덕분에 잠에서 깬 배우자는 둘째 아이를 발견하자 말을 걸었다.


"유치원을 왜 안 가는 거야?"

"......"

"놈팡이가 되기로 한 거야?"

"놈팡이가 뭐예요?"

"아니야..."


두 남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유일하게 집을 나선 첫째 아이에게 무척이나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리고 미룰 수 없는 업무로 인해 오후에 회사로 출발하는 배우자에게 두통약과 인공눈물, 비타민을 전달했다. 특별하지 않아도 탈 없는 하루를 귀하고 감사하게 여기며 행복의 감도를 높여 더 자주 느끼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짜고 치는 구구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