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 검사를 받아보시길...' '단, 강요는 아니니 검사여부는 어머니의 선택에 달린 것' 학부모 상담 때 유치원 교사로부터 듣게 된 말이다. 어머니의 선택이라지만 이민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갈 아이에게 홈페이지 회원가입 시 선택사항의 체크 여부처럼 그냥 지나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갑자기 눈앞에 레몬 한 개가 생겨난 기분이다. 이 레몬을 어떻게든 먹기 좋게 하려면 착즙기에 즙을 내어 탄산수에 얼음을 동동 띄운 레모네이드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바로 가까운 대학병원에 연락하여 요점을 말씀드리고 관련된 과로 진료예약을 잡았다. 상담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대학병원에 예약된 날짜까지는 약 10일이 남았다. 그동안 손과 머릿속은 바삐 움직였다. 책을 보더라도 현재 관심사가 쏠려있는 아동발달 분야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온라인에 각종 키워드로 검색하면 나오는 선배맘들의 후기를 샅샅이 훑어보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조금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과 온라인상에서 보았던 무수히 많은 사례들을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리에서 가볍게 인사하며 마주치는 아이들과 부모들은 대부분 정상발달의 가정에 속해있다. 초등학생인 첫째 아이가 2년 연속 도움반 소속인 친구와 같은 반임에도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아이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될 뿐 학교 밖에서는 통합반 아이들과 그 가정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느 보이지 않는 평균에 선을 그어놓고 그 이하의 그룹에 속하는 이들은 수면 아래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많은 장애인들을 현실에서 마주하는 것이 희박한 것처럼.
온라인에서 아동발달 관련 키워드로 살펴보던 중에 지역사회가 운영하는 육아종합지원센터에서도 매달 신청받은 소수인원에 한해 발달검사를 무료로 진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체 없이 센터의 담당자와 통화하여 무료로 진행되는 발달검사 이후 검사결과에 따라 어떤 진행이 이루어지는지 문의하였다.
혹여나 심층 검사 권고로 나오게 되어 대학병원에서 재검사가 이루어질 거라면 아무리 무료라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대학병원에서 초진을 받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곳의 최종 진행 절차까지 알아본 후 현재 가정의 상황을 밝히며 어느 곳에서 검사를 받는 것이 더 나을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의 발달지연이 심각하다고 판단되면 빠르게 검사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낫다며 되려 나에게 역으로 질문이 날아왔다. 발달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검사를 하는 것인데 검사도 하기 전에 전문가가 아닌 나에게 추이를 묻자 대답이 망설여졌고, 상대방은 한마디로 양육자인 나를 제압해 버렸다.
"엄마가 당연히 알고 계셔야죠." 엄마가 아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한 응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마침 그날 책에서 보았던 인상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모든 아이는 부모의 손을 마르고 닳도록 타면서 자라는 게 정상입니다.' 막내가 첫째 아이만큼 내 손을 덜 타서 그랬나 싶은 생각이 스쳤다.
하루종일 동요를 틀어놓고 노래를 불러주고, 밤새도록 전집을 읽어주던 첫째 아이처럼 막내도 그렇게 키웠으면 달랐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겨우 한두 살 터울인 첫째와 둘째 아이들이 글자를 읽을 줄 안다고 이제 와서 읽어달라는 책을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를 살아가기에는 머릿속의 쓸데없는 감정들이 그렇게 별 도움이 되지 않다는 것을 실전 경험하며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예약된 날짜가 되어 응급실을 제외하곤 대학병원에 생애 첫 발걸음을 했다. 예약시간 20분 전에 도착하여 신분증명서류를 제출하고 수납까지 마친 뒤에야 진료실에서 교수님을 뵐 수 있었다.
대학병원 진료실에서 교수님과 초진을 15분이나 본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동네 소아청소년과에서 의사와 환자의 만남이 1분 컷으로 느껴지는 체감에 비하면 놀랍고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내원 이유를 말씀드리고, 아이는 이름과 여러 가지 묻는 교수님의 질문에 답하며 소근육과 인지를 짧게 테스트하며 알아보셨다.
10분 동안 아이를 지켜보신 교수님은 3가지 검사처방을 내려주셨고, 조음치료는 검사 전부터 진행해도 좋겠다는 의견을 덧붙이셨다. 그 과정에서 놀라운 점은 한 달 넘게 지켜본 유치원 교사만큼 아이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셨고,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육아센터 담당자보다 이성적으로 필요한 부분만 해석하신 점이었다.
또한 양육자이자 보호자가 말씀드린 아이의 환경에 대해 수용하며 들어주셨기에 처방에 대해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3가지 검사는 몇 달 뒤에야 완료할 수 있다기에 그제야 우리가 대학병원에 왔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조음치료인데 이곳의 세계도 선택지가 정말 다양하다.
사설 발달센터에서 언어치료를 받는 것이 대표적인데 센터마다 비용은 다르지만 회당 55,000원 정도이고, 치료 시작 전 초기상담은 필수코스이다. 장점은 거주지 근처에서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점과 나라에서 지원되는 바우처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점은 바우처가 누구에게나 지원되는 것이 아닌 건보료에 따른 소득 수준에 따라서 지원이 안될 수도 있고, 공급보다 수요자가 많아서 대기가 많다는 점이다. 게다가 기관에서 하원 후 이용하는 아동이 많은 특성상 피크시간대는 센터의 예약이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또 병원이나 의원에 부설로 속해있는 발달클리닉에서 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곳이 지역 내에 많지 않지만 부모들이 선호하는 이유는 실비보험을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개 언어치료의 경우 회당 8만 원 정도이고 마찬가지로 원장님과 한 시간 내외의 초기상담은 필수였다. 단 가입된 보험회사와 약관에 따라 실비청구가 되지 않을 수도 있기에 이 점을 염두에 둔 부모는 사전에 필히 알아두어야만 한다. 한두 번 가는 원데이클래스가 아닌 몇 달에서 몇 년이 될 수도 있는 치료개념이기에 경제적인 부분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현실에서는 수면 아래에 있는 듯한 이들을 마주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맞벌이와 다자녀가정으로서 한정된 시간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중 배우자의 동료로부터 비슷한 케이스를 간접적으로 듣게 되었고, 병원과 센터를 각각 한 번씩 다니며 하원 후 총 주 2회 치료를 다니는 것이 최상의 세팅이라는 점도 공감되었다.
한편 검색을 하다 보니 센터에서 이용하는 단어카드와 치료도서들을 보게 되었고, 가정에서도 어쩌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모두 어머니의 선택이라더니 그 말이 더욱 현실이 되고 있다. 과거의 선택들이 현재를 만든 것처럼 지금의 선택이 어떤 미래를 불러올지 모르기에 결정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진다.
5년 전 드라마 <SKY 캐슬>의 김주영 역으로 나온 입시 코디네이터는 극 중에서 "어머니,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라는 명대사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사교육과 달리 공교육과 공공기관에서는 어느 누구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건네지 않는다.
모든 선택은 가정, 특히 엄마의 몫이라는 것이다. 아이를 믿어줄 사람도 엄마인 나뿐이라는 생각이 커져간다. 저출산시대에 낳기만 하면 신생아특례대출부터 대학교학자금까지 여러 복지 혜택을 내놓고 있지만 정작 엄마로서는 점점 더 어렵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