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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Feb 15. 2023

아이고 좋을 때다

갑자기 할머니가 되었나

15살 중학생은 11월 11일 책가방에 주섬주섬 여러 종류의 빼빼로를 챙겨 등교했었다. 그러나 가방을 가득 채운 빼빼로는 생활지도 선생님께 모두 보기 좋게 압수를 당해 친구에게 선물로 주지도 못하고, 같이 나누어 먹을 수도 없었다. 전날 미리 학교에 초코 간식을 가져오지 말라는 공지를 해주셨고,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자신감에 사로잡힌 여학생의 자업자득이었다.


21살 어느 날엔 남자친구에게 초콜릿을 선물하기 위해 DIY 재료를 용감하게 구입했다. 엄마의 주방에서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초콜릿을 녹이며 틀에 부어주고 쿠키에 초코를 입힌 후 유산지에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을 거치며 든 생각은 딱 하나뿐이었다. '아, 이런 건 그냥 사 먹는 거구나...'

분명 틀에 부운 초콜릿은 모양이 제각각이고, 유산지에 내려놓은 초콜릿 옷을 입은 과자들은 유산지에 딱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주방을 초토화시켜 놓고, 겨우 제모양을 갖춰 살아남은 것들만 포장해서 전달한 후 다시는 직접 만들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이후 10년이 넘도록 육아를 하면서도 아이와 집에서 쿠킹클래스는 배제한 채 스스로의 다짐이 잘 지켜지고 있었다.


지난 주말, 최근 집밥으로 채식식단을 많이 제공하는 엄마에게 이렇다 할 불만을 표현하진 못하고 갑자기 굳은 결심을 한 듯 딸아이가 단호하게 원하는 바를 밝혔다. 집 앞 떡볶이 가게 이름을 말하며 메뉴도 콕 짚어 '로제파스타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웠고, 나 역시 직접 요리한 집밥 말고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었지만 주부의 입장에서 매번 사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이번 아이의 제안을 듣고 단번에 승낙했다.


집에서 포장주문을 미리 해두고 시간 맞춰 가게에 가지러 가는 방식을 택했다. 픽업예정시간보다 3분 미리 도착한 가게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떡볶이집 남자 사장님과 20대 초반의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곧 다가올 밸런타인데이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남자친구 안 만나?"

"내일(토요일) 만나요."

"자주 만날 때지~"

"아! 밸런타인데이 챙겨야 할까요?"

"......."

"참고로 저희 아빠는 안 챙기면 엄청 서운해하세요."

"ㅎㅎㅎ"



대화를 마칠 즈음 우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좋을 때다.'

그 생각을 듣고 좌뇌가 흠칫 놀라며 이렇게 속삭였다.

'이게 무슨 할머니 같은 소리인가?'


여태껏 30대 여성에게서 이런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데, 내 안에 할머니가 있었나 싶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곧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오는 것을 떡볶이 가게에서 알게 되었고, 서비스로 콜라를 받아와 아이들과 행복한 분식파티를 했던 토요일 저녁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성인 발렌티누스를 기리는데서 유래된 2월 14일은 1861년 영국 리처드 캐드버리라는 인물이 밸런타인 데이 때 초콜릿을 선물하는 광고를 기획하면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후 좋아하는 친구나 연인 사이에 초콜릿을 선물하기에 아이들과 자주 가는 편의점에서도 달콤한 간식들을 한데 모아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밸런타인데이 따위 필요 없는 3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20대 아르바이트생과 같은 그런 고민 없이 아들에게 수시로 초코간식을 사주는 지금이 정말 좋다. 그리고 2+1 행사 중인 에이비씨초코를 사 와서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 배우자에게 출근하는 아침 커피와 함께 한 봉지를 건넸다.


챙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그 시절도 아름답지만, 사람들이 만들어낸 곳곳에 스며든 기념일 덕분에 사랑하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특별한 이유 없이 선물할 수 있는 지금도 눈부시게 편안하고 아름답다면 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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