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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Feb 22. 2023

죄송한 건 아닌데 죄송합니다.

평일 오전 갑작스레 지역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여기 OO네일인데요."

"......?...... 아!"

"아, 모르세요?"

"아니요. 아니요. 알아요!"


돌이켜보니 결혼 10년 차인 여자는 2년 주기로 네일아트샵에 다녀오곤 했다. 이번 전화는 가장 최근인 18개월 전에 이사 온 근처 동네를 탐방하다 예약 없이 들어간 가게로부터 온 것이었다. 때마침 이사 후 다가오는 명절에 배우자의 이른 휴일이 시작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했다. 세 아이를 육아하며 매일 주방과 한 몸처럼 지내온 여자는 몇 년째 지독한 한포진을 지나왔고, 새로 들인 식기세척기의 신세계에 매일 놀라는 중이었다. 더불어 가장 고생했을 손에게도 보상을 해주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네일숍에서 케어와 함께 젤네일 시술을 받으며 혼자 운영하시는 사장님은 동네 토박이로서 신참내기에게 동네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중심상가에 있는 어느 치과에서 시술받았다가 잘못되어 고생하고 소송까지 진행 중이셨고, 근처 전통시장의 과일가게와 반찬가게 사장님들이 장사가 잘되어 옆건물을 사셨다는 이야기를 펼치시며 옛 동네 미용실 분위기를 자아내셨다. 또한 아이들이 갈만한 치과와 소아과도 알려주셔서 내내 기억에 남았다.


만족스럽게 젤네일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 이사 와서 동네의 소식들을 알아가고 있는 모양새가 꽤나 새 출발을 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당일 진행했던 부분에 대해서만 결제를 했어야 했는데, 30대 중반의 여자는 20대 초반의 추억을 소환해 내서 선불권으로 결제를 진행했다. 선불권은 결제금액보다 10% 추가 적립을 해주며, 매장마다 다르지만 이용 시 10% 할인 차감해 주었다.


안타깝게도 그 이후의 방문은 아직까지 없었고, 위의 통화에서 다음 대화내용은 이러했다.

"금액이 아직 남아있어서요."

"아 금액이 얼마나 남아있나요?"

"4만 원 넘게요. 제가 그냥 소멸시킬 수도 있는데 아이들 있어서 자주 못 나오신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요."

"아, 네..."

"언제 한번 오시면 그래도 손 한번 봐드릴게요."

"그럼 이번주 토요일에는 배우자 출근이라 방문이 어려워서요. 다음 주 토요일 방문해도 될까요?"

(참고로 일요일 휴무 매장)

"아, 그때는 제가 일이 있어서 매장 문을 닫아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죄송한 건 아닌데 죄송합니다.


이미 방문한 지 1년이 훨씬 지나 금액을 소멸시켰어도 할 말이 없는 고객이지만, 고객의 말을 기억해서 소멸해두지 않고 일부러 전화를 주신 네일숍 사장님과 통화를 마치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초등학생 첫째 아이의 방학을 비롯해서 세 아이를 가정보육 중이고, 배우자는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돌아오는 생활을 주 7일 넘게 이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네일숍을 방문하는 희망을 포기하진 않았다. 다만 매슬로우의 인간 욕구 5단계 이론에 따라 네일아트보다는 생리적 욕구(식욕, 수면욕)와 아이 돌봄을 위한 독서와 운동이 우선시되어야 했기에 그만큼 충분한 시간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또 2년을 채우고 돌아오는 가을에 방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부디 선불권을 결제하지 않길 빌어본다. 나 홀로 가벼운 마음으로 네일숍에 가는 상상을 하며 이번 겨울에는 방구석 네일숍을 오픈했다. 첫눈이 오기 전에 봉숭아색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신박한 이야기를 듣고, 봉숭아 물들이기 키트를 구입해서 정성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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