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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Mar 22. 2023

싫어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다면?

부조리

초등학생 시절 수업 중 선생님께서 해외여행 경험 여부를 질문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가족끼리 국내여행도 거의 경험이 없었던 사람으로서 해외여행에는 당연히 해당사항이 없었고, 손을 든 아이는 반에서 10% 정도였다. 그때부터였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마구 일었다. 그렇지만 가계 상황을 눈치와 코치로 제법 아는 10대였으므로 부모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떼쓰는 어린이가 되지는 못했다. 이후 사춘기가 제법 지나고 엄마에게 외국의 나라 이름을 말하면서 그곳에 여행 가면 어떨지 넌지시 질문을 던져보았다. 당시 엄마는 99% 부정적인 소식만 나오던 뉴스와 숨겨진 사건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주는 <그것이 알고 싶다>와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단칼에 치안이 안 좋다는 이유로 상황을 정리하셨다. 결국 부모동반의 가족여행이 어려웠던 미성년자를 지나고 스무 살이 되어서야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돈으로 제주도와 가까운 이웃나라를 비행기를 타고 다녀와볼 수 있었다.


세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드럼을 배우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씀드리자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야기하시며 대학 가면 맘껏 해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던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왜 스무 살엔 되고 열여덟 엔 안되지?'

졸업 직전 학과에서 관련 직종으로 대면 면접을 보고 학점은 내가 더 높았지만 남학생들의 취업 소식을 먼저 접하게 되었을 때, 20대 여성이 중소기업에 결혼 소식을 전하자 출산계획은 좀 미룰 수 없냐는 말을 들었을 때, 임신을 하고도 실제 번듯하게 있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당사자만 빼놓고 임원진들이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등 살아오면서 보이지 않는 세상이 또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10대와 20대에도 느꼈지만 30대의 다른 점은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것을 제대로 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유아들이 자신의 감정을 구체적이면서 제대로 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좋아' 혹은 '싫어'라는 단순한 대답이 나오는 것처럼, 그저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나의 10대는 짜증이 많았고, 20대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7살 아들이 1년 넘게 다니고 있던 음악학원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그동안 수업을 10분 일찍 끝내달라거나 당장 하루만 쉬고 싶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앞으로 배움을 멈추고 싶다는 말은 처음이었기에 당황했어도 받아들이고 그날 학원이 아닌 집으로 향했다. 기관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피곤했을 수도 있고, 일시적인 발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학원에는 하루 쉬겠다고 말씀드리고 아들과 집에서 책을 보며 낮잠도 자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다음날도 아이의 의견은 동일했다. 마침 누나와 같이 다니고 있었기에 학원 앞까지 온 상황이었고, 온 김에 전화가 아닌 직접 보고 말씀드리는 게 맞다고 판단되었다.


어제의 상황과 아이의 의견을 말씀드리자, 원장님의 말씀은 물 흐르듯 콜센터 직원처럼 쉬지 않고 이어졌다. 아이들의 슬럼프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며, 악기를 배우는 것은 미술처럼 재미와 흥미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생각하는 머리를 써야 하기 때문에 기관에 가듯 항상 가야 한다는 것이 기본으로 되어있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다니게 된 지 이미 15개월 정도 되었기 때문에 바이엘 기초과정을 90%는 마쳐서 지금 그만두면 무척 아쉽다는 점에 엄마로서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다. 선택권을 아이에게 넘기기보다는 어느 정도 단호함을 가지셔야 한다는 말씀에 결국 이런 말을 꺼내게 되었다. "그런데 제가 그런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집에서는 친절하면서도 단호한 이미지의 엄마이지만, 밖에서는 꽤나 허술해 보인다는 점을 알고 있다. 세 아이 중 막내만 병원에 데려갔을 적에는 간호사로부터 이런 질문을 어렵지 않게 받는다.

"첫아이시죠?"

"아니요..."

"아, 그럼 둘째인가요?"

"아니요.."

'왜 말을 못 해! 왜 셋째라고 말을 못 하냐고!!!'


이러한 에피소드를 여럿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꺼냈으니 원장선생님은 다른 어머니들의 사례를 해결책으로 떡하니 말씀하셨다. 그건 마치 요리할 때 사용하는 조미료 같은 느낌이었다.


보통은 싫어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으면
좋아하는 것도 같이 그만두자고 하세요.


그 말을 듣자마다 토끼눈을 한 채로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다시 한번 말씀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두 번을 듣고서야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의 사례로 예를 들면 일주일에 한 번 가는 미술은 좋아하고 피아노는 힘들어해서 그만두고 싶으니, 음악학원을 그만두고 싶으면 미술학원도 그만두는 제안을 아이에게 해야 하는 것이다. '오 마이갓'


나는 평생 아이와 이런 조건이 달린 협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좋아하는 것을 약점 삼아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해야 하는 아이는 갑자기 어딘가 아프다는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릴 적 음악학원에 가려고만 하면 계단에서 갑자기 배가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 싫어하는 것을 그만둘 때는 좋아하는 것도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아이가 왜냐고 묻는다면 정말로 해줄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강력한 눈빛과 단호한 말투를 들으면 아이는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좋아하는 쪽을 더 원하면 싫어해도 억지로 하는 것으로, 싫어하는 쪽이 강하면 좋아해도 포기하는 것으로. 아이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10대도 되기 전에 느껴버릴 테지만 그것을 제대로 된 언어로 표현하긴 어렵기에 화와 짜증이 잦아질 수 있고, 스크린타임이 늘어날 것이며 모자의 관계악화는 안 봐도 뻔하다.


훗날 아이가 본인은 왜 피아노를 배웠으면서 체르니도 못 들어갔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미리 예견해서 '다 너 잘되라는 말이야'라는 식의 판단은 맞지 않을 수 있다.

부조리함을 물려주고 싶진 않다.

부모에게만이라도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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