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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Mar 18. 2023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야만 해

갑자기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작가들은 소설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시작하는 것일까. 일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영감을 받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인지. 아니면 본인 이야기를 직접 드러내기는 곤란하니 다른 가상의 인물을 앞세워 그 캐릭터에 이야기라는 숨을 불어넣는 것인지. 두 가지 다 포함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한 배우자를 제외하고 아침마다 우리 집 4명은 집을 나선다. 첫째 아이는 초등학교로, 둘째 아이는 유치원으로, 셋째 아이는 엄마 따라 그냥 나올 수밖에 없는 루틴이 되어버렸다. 승강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첫째 아이는 같은 반 아이를 만나 먼저 인사를 하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아침이라 저각성상태인 둘째 아이와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유치원으로 향하던 중 첫째와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여자아이를 만났다. 이름과 얼굴만 알고 있던 수희(가명)는 첫째 아이와 나이도 같으니 식구처럼 우리 셋과 걸음을 나란히 하고 있었다.


수희가 먼저 말문을 열며 얼떨결에 대화가 시작되어 버렸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7살 OO이 유치원에 가는 길이야"

"OOOO유치원인가요?"

(가장 가까운 사립유치원을 말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안에 있는 병설유치원에 가는 길이야"

"아 맞다! 들은 적 있어요. 옆에 동생은 유치원 안 가요?"


지금까지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한테서 받아보았던 질문을 9살 어린이에게 받게 되니 그 답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잠깐 난감했었다.

"응, 6살 OO 이는 아직 안 다니고 집에서 놀아~"

"왜요? 다니는 게 당연한데? 요즘 0살도 다 다니던데요?"

"응~ 그러게~"

"그럼 내년에는 가요?"

"응 7살에는 다녀볼 생각도 하고 있어~"

"그래도 학교 가기 전에 1년은 다녀보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야 학교 가서 갑자기 스트레스받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겠구나. 맞아~~"


이전부터 느낀 점이었지만 수희 얼굴엔 표정이 별로 없다. 오후엔 늘 그랬는데, 아침에도 여전히 힘들어 보이는 얼굴이어서 좀 웃었으면 하는 마음에 다른 종류의 스몰토크를 시작했다.

"수희는 집에서 예쁨 많이 받을 거 같아~"

"맞아요~ 동화책에서는 누나한테 동생 돌보라고 엄마들이 그러지만, 우리 집은 엄마가 동생 몰래 나한테만 피규어 사준적도 있어요!"

"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내 동생은 엄마가 일해서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있는데 친구랑 많이 논다고 좋아해요~~"

"나는 유치원도 학교도 다 싫은데.. 쉬는 날이 두 번밖에 없어서 별로예요."

"그러게~ 하루라도 더 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안된다는 현실을 나도 수희도 알기에 둘 다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엄마는 물리치료사예요!"

"그렇구나! 훌륭한 분이시네!"

그 이유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교문을 통과했고, 아침부터 너무 TMI인 거 같아서 생략했다.

7살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 건물 앞까지 와서 수희와도 손을 힘차게 흔들며 인사했다.

"수희야 좋은 하루 보내!!!"

그렇게 오른손에는 6살 딸, 왼손에는 7살 아들의 손을 잡고 15분 내내 수희와 뜻밖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는 오랜만의 이 드라마를 구상하게 된 계기가 고등학교 2학년인 딸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내가 누군가를 죽도록 때리면 마음이 아플 거 같아, 아니면 죽도록 맞고 오면 마음이 아플 거 같아?" 질문만으로도 이미 어질어질할 정도이고, 김은숙 작가님의 결말을 최근 보고 나니 누군가의 결말을 혼자 상상할 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작년 내내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그냥 조금 까칠한 어린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수희의 8살과 9살은 대체로 숨이 차보였고, 분명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책가방을 메고 실내화가방을 들고 있지만 훨씬 더 무거운 무게를 지고 있는 듯 보였다. 지금의 수희 모습이 10년이 지난 후 18살, 19살이 된다고 해서 갑자기 행복한 기운으로 가득한 청소년이 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행복해져도 모자랄 것만 같았다.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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