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in Paris @Le Marais
20대에는 영화를 보거나, 영감을 주는 장면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글을 올렸다. 누군가에게 읽어달라고 하진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읽히길 바랬다. 얼마나 읽었고 누가 답글을 달았는지를 거듭 확인했으니까. 소개팅을 나갈 때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싸이월드 계정을 훑어 보는 것은 국룰. 그 외에도 닮고 싶은 사람이 있거나, 짜증나는 사람이 있을 때도 그 사람을 알기 위해 싸이월드의 글과 사진을 염탐했다. 짧은 글과 사진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매력을 최대로 드러내고, 호감을 얻고 싶은 욕망을 싸이월드가 대신해줬다. 나의 소셜미디어 황금기.
30대는 페이스북을 한창 했다. 정신없이 회사와 집을 오갈 때, 육아 에피소드나 회사 뒤의 소회를 짧은 글로 풀어내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러다가 회사 사람들이 내 페이스북에 답글을 다는 걸 보거나,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로 페이스북에 글을 남기지 않았다. 회사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니까.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을 구분하고 싶었고, 내 속살을 내가 싫어하거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보면서 이러쿵 저러쿵 규정할 있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았다.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네트워크의 확장이라니, 불편하고 신경쓰였다.
40대의 소셜미디어는 훨씬 더 방대해졌다. 강사로서 1인기업을 준비할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SNS를 해야 한다"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생존의 룰이 바뀐 것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링트인, 블로그, 브런치의 계정을 실력있고 자신감 넘치는 강사 & 코치의 프로필로 보이도록 업데이트했다. 그리고 내가 강의하는 분야의 내용이나 내세울만한 일상들을 선별해 주기적으로 올렸다. '하고 싶다'가 아니라 '해야만 한다'는 의지로 관리하다 보니, 글을 올릴 때 마다 에너지가 많이 쓰였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네트워크 상에 있는 동료 강사들의 글과 나를 비교했고, 그들만큼 뛰어나지 않은 나를 자책했다. 가끔씩 보게 되는 소셜미디어 상의 나는 나같지 않았다. 스스로 사기꾼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애써 시작한 SNS를 멈췄다. 진짜 자신있는 이야기, 진짜 올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만 올리자, 진정성있게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SNS를 그만뒀다고 내 사회적 정체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소셜미디어에서 일어나는 많은 정보와 관계의 만남을 놓치고 있다는 깨림찍함을 뒤로 한 체.
하지만, 여기 이 곳 파리에 와서, 열심히 내 얘기를 온라인 그물망에 올리는 나를 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매일 매일의 여행기를 르뽀 취재 기자처럼 자세히 써서 이 곳 브런치에 업데이트 하는 것이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정 중 하나다.
카카오톡에도 새로 생긴 스토리 업로드 기능을 사용해, 주요 사진들을 매일 올린다.
떠나기 전, 페이스북과 인스타에 올린 비행기 티켓과 찍은 사진에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올린걸 보며, 흐뭇한 마음을 즐긴다. 파리에서의 나의 모습은 진짜 나인가? 난 충분히 진정성이 있는 걸까? 사람들의 반응에 흥분하는 나는 속물인가?
하지만 한편으로, 어쩌면 나의 속물 포비아, 진정성 페티쉬가 나의 다양한 모습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란 생각도 든다.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인간이 스스로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인정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을 벌인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단순히 생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확인하고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SNS 상에서 '좋아요'에 목 메는 것 역시, 나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기 위한 인정투쟁의 현대적 형태이다. 물론 부작용은 있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도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기대하고 포장하는 것이 가져오는 부작용과 본질적으로 같다. 우리의 가장 상위 욕구인 존중 욕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는다. 오프라인 보다 더 많은 많은 관계가 이뤄지는 온라인 상에서 인정을 바라는 욕구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진정성있지 않은가.
"현대인은 천 개의 페르소나로 살아가고, 그 모든 것이 나의 모습이다"
심리학자 칼 융은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를 메타포로 활용해,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다양한 얼굴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했다. 그리고, 페르소나는 사회적응에 필수적이지만, 개인이 페르소나에 지나치게 동일시되어 내면의 진정한 자아(Self)를 잃어버릴 때 심리적 문제를 겪는다고 보았다.
하지만, 다양한 가면을 쓴 모습 역시, 나의 일부이다. 배우 박중훈이 언젠가 한 토크쇼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같은 배역도 어떤 배우가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이 된다고'
내가 의무감으로 만들어낸 전문성있는 강사와 코치의 모습도 나이고, 지금 이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유럽에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모습도 나다. 이 다양한 모습들을 온라인 상에서 타인에게 확인받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 인간이고, 사람들의 기대를 받아 더 나은 사람으로 되어 가는 동기를 얻는 것이 인간이니까. 나에 대해 사람들이 긍정적인 반응만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 낸 나의 모습이니, 거기에 대해서는 내려놓아야 한다. 남의 마음까지 내가 어찌할 수는 없으니까.
부동산 정책이 보여주듯이, 인간의 욕구는 억압하면 더 튀어 오른다. '진정성'이라는 멋진 단어 아래, 나의 표현 욕구, 인정 욕구, 존중 욕구를 억압하는 것은 40대에도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내가 나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뺏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나의 욕구에 충실한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
마흔여덟이면, 나의 다양한 페르소나를 인정하기에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기를. 소셜 미디어가 가진 확산성이 때론 두렵더라도, 그 장점을 바라보며 용기 있게 발산할 수 있기를.
그러면서 시시각각 드러나는 나의 다양한 파편들을 바라보고 인정해주기를. 그렇게 나를 분화시키고 다시 재 통합해 가기를.
2천 년 전 공자님도 논어에서 얘기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매일매일 새로운 페르소나와 그 뒤에 숨겨진 진정한 나를 통합하며 고인물이 아닌 맑은물로 흐를 수 있기를.
아, 글쓰다 해가 져버렸다. 파리의 마지막 밤, 몽마르뜨를 보러 얼른 나가봐야겠다!
Go go Carrie!